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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0. 2020

겨울정원 (2)

거의 식음전폐 수준.

    내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지.

    주원은 일주일간 전화 끊어놓고 책에만 매달렸다. 

    읽기도 힘들게 마구잡이로 쓴 글들을 해독해 가며 하나하나 따라하고 반복하고 실수하고 책 다시 들여다보고 연습하고 손에 익혀 나갔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집 안에 있는 실뭉치, 컵, 종이상자, 보자기 등등을 죄다 뒤져서 갖다놓고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손이 제법 부드럽게 돌아간다. 

    오호.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 빼놓고는 대부분 기본기는 익혔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손에 익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손목을 이렇게 돌려서 검지를 요렇게 빼고 다른 손으로 밑을 받친 다음 엄지를 척 치켜들면서…….

    흠. 요거였구나. 

    손수건 착 펴서 구슬 하나 올려놓고 양손으로 손수건 끝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리다 갑자기 확 뒤집는다. 구슬은 어디로 갔을까?

    주원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의 귀 쪽으로 손을 내밀다가 손가락을 탁 퉁기면서 손바닥을 폈다. 

    짠! 요기 있지요.

    손바닥 위에 놓인 구슬.

    그러나 아직 서툴다. 들키기 딱 맞다.

    연습, 연습, 연습…….

    주원은 집에서 가까운 큰 서점에 갔다. 마술책을 종류별로 다 사왔다.

    진작 사올걸.

    종류도 훨씬 다양하고 설명도 상세하고 사진도 선명했다. 게다가 컬러로.

    그런 책으로 공부하니 더 잘 되는 것 같았다.

    또 며칠간 책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마술학원?

    인터넷을 쳐보았다. 여러 군데가 나왔다. 주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있었다.

    주원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 전화로 번호를 눌렀다. 

    네, 짜자잔마술원입니다. 상대방이 받는다.

    주원은 갑자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주원은 전화를 끊었다. 

    아니지. 의리는 지켜줘야지. 

    의리? 뭔 의리?  

    그래도…….

    쳇, 별 게 다 갈등이 되네. 

    에잇, 그래도 단골이 낫지. 

    단고올? 

    그 말이 이상하면 구관이 명관. 

    명관 소리 한다. 

    내 맘이야.

    주원은 한숨을 푹 쉬며 핸드폰을 켰다. 와르르 쏟아지는 카톡 메시지들.     



인간은 기세가 등등해서 폼을 잡는다. 그래, 있을 때 맘껏 즐겨라. Carpe diem.

    인간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알았어, 알았어. 잘 가르쳐 주기만 해.

    주원은 집에서 매일 홍은동 태권도 도장으로 출근했다. 열흘 동안.

    인간은 싱글벙글 세상이 다 자기 것이 된 양 창고에서 온갖 것 다 꺼내와 주원 앞에 늘어놓았다. 

    주원은 그것들을 보고는 글자 그대로 기겁을 했다. 

    세상에,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장만했대. 이런 거 다 사용해야 되는 거야?

    주원은 인간을 우습게 보았던 것이 좀 미안했다.

    “이거 다 사모으려면 돈 많이 들었을 텐데…….”

    “그래서 늘 이렇게 쪼들리는 겁니다.”

    편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이런 거 꼭 해야 돼요. 프로로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내 직업에는 꼭 필요해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편가.

    “안 하면 되잖아요.”

    “남보다 다른 게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일 안 들어와요.”

    “좀 다른 거 찾아봐요.”

    “에이, 마술을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편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주원 씨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배우는 거 아녜요?”

    싱글벙글.

    주원은 편가를 노려보았다. 

    아유, 얄미워……. 

    이렇게 해서 주원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또 한 가지 안 것이 있었다. 

    인간의 태권도 솜씨였다. 주원에게 보여주려 온 힘을 다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우쭐대던 것이 나름대로 이해는 되었다. 마술 가르쳐 줄 때의 그 섬세함에서는 상상도 못할 파워와 절도가 나왔던 것이다. 

    바디페인팅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변신 꺼풀. 그 하나하나가 좀 엉뚱하긴 하지만 약간씩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인간 정체가 뭐야? 전공이 뭐지? 어떤 직업에 집중하려는 거야?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어떻든 주원은 인간에게서 배울 것은 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술에 집중했다. 

    인간이 꺼내오는 장비들 익히는 것 그 일도 쉽지 않았다. 그 중 극히 일부분만 만지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이 꽤 성심껏 가르치는 것도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 종류들만 적절히 잘 골라서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주원은 그러나 좀 혼란스러웠다. 현재 자신의 입장이. 

    마술을 배워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천방지축으로 뛰고 있는 자신의 마음.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자신.

    사실 집에서는 잔소리가 심하다. 왜 매일 나가냐고? 어디에 가는 거냐고? 

    그런 거 다 무시하고 매일같이 이곳에 오는 주원. 

    뭐 하자는 건지…….

    주원은 미리 약속해 놓은 콘서트 중에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만 빼고 나머지엔 모두 눈을 감고 있었다.

    목적이 뭐야?

    이렇게 해서 마술을 배우려 하는 게 무슨 이유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모르겠다.     


     

집에 빨리 오라는 카톡을 받고도 주원이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현관문을 열고 짧은 통로를 지나 널따란 거실로 들어가는데 남궁 여사가 팔짱을 끼고 서서 쏘아본다. 

    주원은 아무 말 없이 남궁 여사 옆을 지나 이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저녁은?”

    “먹었어.”

    주원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층으로 거의 다 올라갔는데 또다시 주원 뒤통수로 날아오는 화살.

    “내일 잘 준비해.”

    “…….”

    주원은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다 뒤돌아보았다.

    “뭘?”

    “아침에 말했잖아. 내일 아침 브런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 아, 그거……. 

    잊고 있었다. 

    주원은 대꾸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털퍼덕.

    소파에 주저앉아 앞만 멍하니 바라본다. 

    멍하게.

    그냥 멍.

    그러다가 주원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실로 갔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 한참 서 있다가 주원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손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양손을 들었다가 한 손을 내리고 팔을 옆으로 비틀면서 다른 손을 허리 뒤로 슬쩍 감춘다……. 

    주원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돌았다. 

    좋아.

    주원은 샤워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거렸다. 요렇게 조렇게…….

    재미있었다. 

    동작이 점점 커져갔다.

    허리를 돌렸다. 몸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얼굴은 앞으로 향하고 미소를 살짝 지은 채 오른손으로 관객들 시선을 천장 쪽으로 끌고 올라가다가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짠!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주원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쏟아지는 샤워가 마치 오색 종이테이프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     



신경 안 쓰려 했는데도 괜히 마음이 바빴다. 

    헤어아트에 갔다 올 걸 그랬나……. 

    옷을 미리 골라놓을 걸 그랬나…….

    화장은 해, 말어…….

    손톱? 이것까지는…….

    귀걸이를 할까…….

    네클리스는…….

    아이고, 다 관둬라.

    관심 없는 척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아줌마들에게 잘 보이면 뭐 어떻게라도 되는 거야?

    그렇게 자신이 없어?

    아침 일찍 잠이 깨어 혹시라도 아래층에서 들릴까 봐 조심조심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이옷 저옷 들춰보면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주원은 갑자기 마음이 시들해졌다. 

    아줌마들 몰려와서 선을 보든가 말든가.

    단 하나 좀 걱정스러운 것은 그 브런치인가 뭔가 하는 시간까지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좀이 쑤셔서 어떻게 기다린담? 그때까지는 밖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주원은 목을 돌리며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후우―.

    그래, 엄마 마음 맞춰주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남궁 여사는 아침 건너뛰고 브런치 먹겠다고 버티면서도 슬쩍슬쩍 과자랑 몇몇 가지를 남들 눈에 안 띄게 먹고 있었다. 주원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엄마, 그냥 많이 드세요. 그 사람들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주원은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남궁 여사가 원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주원은 적당히 분위기는 맞춰주자고 생각했다. 남궁 여사는 주원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지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을 거는 척하며 이층에 와서 들여다보고 내려갔다. 주원은 무심한 척 의식하는 척 중간 정도로 적당히 행동했고. 

    10시 반경에 손님들이 온다고 했다. 

    거 참, 이런 일도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10시가 넘어가자 주원은 괜스레 손도 꼬아보고 다리도 뻗어보고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고 머리도 만져보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

    …….

    모르겠다.

    그런데 손이 심심했다.

    옷장 문을 열고 이것저것 꺼냈다. 마술도구. 인간에게서 받아온 간단한 것들.

    그것들을 가지고 노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재미있었다. 

    주원은 마술을 배우면서 특히 손끝으로 재주 부리는 것들을 빨리 익혔다. 아마도 바이올린 연주로 인해 손가락을 많이 사용한 것이 도움이 된 듯했다.  

    아, 소리가 난다. 드디어 오는 모양이구나.

    평소에는 아래층 소리 전혀 못 들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들려오는 것이다.

    귀가 이상해졌나…….

    주원은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다시 앉았다. 

    가방으로 손이 갔다.

    마술도구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저 사람들 옆으로 지나가듯이 선보이고 곧장 홍은동으로 가야지.

    아래층이 약간 왁자해진다.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10시 29분.

    정확히들 오시네.

    또다시 손을 오물오물.

    심심했다. 

    손을 뻗어서 가방에 다 안 들어가 소파 한 구석에 놔둔 마술도구 하나를 잡았다. 조그만 통. 마술사들이 입는 옷의 헐렁한 소매에 감춰두는 것이었다. 주원은 그 통을 왼 소매에 억지로 밀어넣었다. 재킷 소매통이 좁아서 너무 꽉 끼어 팔이 좀 아팠다. 

    남궁 여사가 11시쯤 올라오겠다고 했으니 마음 좀 느긋하게 갖자고 생각하고 음악을 틀었다. CD.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번호 61 중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Part I.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연주. 편한 곡은 아니지만 그냥 그것을 골랐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우크라이나 출생의 거장. 육중한 느낌의 인상과는 달리 섬세함의 극치를 보이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냉전시대 소련의 천재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최초로 미국에 소개한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

    주원이 자주 연주하는 곡은 아니지만 오이스트라흐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이 곡을 가끔 듣곤 했다. 아마 오이스트라흐의 눈매가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서 이 CD를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눈. 사람들의 눈을 보아야 한다.

    그들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주원 쪽으로 모으게 해야 한다. 주원의 동작 하나하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기대를 갖게 해야 한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며 마음과 시선이 집중되도록. 

    이때 손, 손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마술사의 손을 따라간다. 저 손이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수작은 이미 그전에 끝나 있다. 소매 속에.

    손은 천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허공을 떠돈다. 그리고 작은 점 하나를 만들어 그것이 저 먼 우주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듯 급격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점이 순식간에 거대한 운석으로 변하여 관객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놀란 듯 손은 요동을 치며 요란한 움직임으로 사람들 마음에 압박감을 준다. 관중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며 다음에 올 카타스토로피(catastrophe)적 파국을 기대한다. 이때 두 손이 하나가 되며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클라이맥스가 터져나온다. 왼손에 감추어둔 통으로부터. 번쩍 빛을 발하며. 바로 그 순간…….

    똑똑똑.

    얌전한 노크.

    괜히 주원의 낯이 간지러워진다. 

    주원은 일어섰다. 

    남궁 여사가 부드러운 모습으로 들어온다.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만 말한다.

    주원도 눈으로 답했다. 

    가방을 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남궁 여사의 미간이 약간 찌그러진다. 눈이 주원의 가방으로 향한다.

    주원은 모른 척하고 어깨에 멨다. 

    남궁 여사는 주원에게 다가와 가방을 어깨에서 벗겨내려 한다.

    주원은 순순히 가방을 내주었다. 

    남궁 여사는 가방을 받고서 내려놔야 하나 들고 내려가야 하나 잠시 우물거린다.

    주원이 다시 가방을 잡았다.

    남궁 여사가 멋쩍은 얼굴로 가방을 내준다.

    주원은 가방의 끈을 잡고 문 쪽으로 몸을 향했다.

    남궁 여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몸을 돌려 주원 앞에서 문으로 걸어갔다.      



남궁 여사와 주원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약간의 긴장감.

    앞에서 내려가는 남궁 여사의 뒷머리가 닭벼슬처럼 올라간 듯했다. 머리에 너무 힘을 준 것 같았다. 앞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뒤에서 보니 눈에 금방 띄었다. 왜 하필 머리 뒤에 힘을 주었지? 보이지 않아서 몰랐나?

    주원은 신경이 쓰였다. 

    계단을 다 내려갔다. 

    널따란 거실 한복판의 8인용 소파에 심사관들이 앉아 있었다. 

    남궁 여사가 사뿐사뿐 심사관 쪽으로 다가가다가 몸을 살짝 돌려 주원의 팔을 잡는다. 

    심사관들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인다.

    남궁 여사가 심사관 쪽으로 몸을 돌려 입을 연다.

    “여기 이 애가 우리…….”

    남궁 여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주원이 뒷머리를 만졌기 때문이다. 뒷머리 속에서 어떤 종이상자 같은 것이 삐져나와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엄마, 이거…….”

    남궁 여사는 놀라서 팔을 들어올려 뒷머리를 만진다는 것이 동작이 너무 커서 팔을 휘두르는 형태가 되어 몸이 빙그르르 돌면서 주원의 오른쪽 옆구리를 쳤다. 

    주원은 갑자기 엄마의 팔에 얻어맞으면서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무거운 가방을 팔에 걸치고 있어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주원은 왼팔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 허리 높이의 좁다랗고 길쭉한 화분을 밀어뜨리고 말았다. 

    화분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천장 가까이까지 솟아 있었던 실내 관상용 나무가 심사관 쪽으로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주원의 왼팔 속에 감추어 두었던 통이 눌리면서 주원의 소매 밖으로 튀어나왔다. 스티로폼 솜 같은 새하얀 거품 덩이들이 펑하고 터져나오면서.  

    또한 주원은 몸의 균형을 잃으며 그대로 넘어지면서 기다란 화분 위로 쓰러졌다. 

    우당탕탕탕 와르르르.

    이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심사관들의 요란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리고 역시 그와 동시에 거실 공간은 거품 천지가 되어버렸다. 

    아직 겨울은 되지 않았지만 11월 말에 접어들고 있어서 강원도 쪽에는 첫눈이 왔다고 하지만, 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11월의 함박눈 가득한 겨울을 맛본 집은 아마도 정 회장 댁이 유일할 것이다.     

    주원은 병원에 실려갔다. 병실에 입원했다.


사실은 그리 많이 다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궁 여사의 요란법석에 앰뷸런스가 오고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가서 드러눕게 되었다.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주원의 다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벅지에 약간의 멍이 들었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남궁 여사는 깁스를 해야 한다고 법석을 부렸다. 병원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남궁 여사가 어디에 가서 구했는지 붕대를 잔뜩 가지고 와서 주원의 다리를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강제로 꽁꽁 싸매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안 된다고.

    남궁 여사의 전화를 받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번에도 마침 강남의 큰 절에 가 있다가 지난번 그 스님과 함께 온 둘째 이모였다.

    이날도 역시 고매하신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환자의 쾌유를 빌기 위해 목탁을 두드렸다. 불경을 암송하면서.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남궁 여사는 그 전날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용하다는 도사에게 찾아갔었다. 그리하여 여차여차 저차저차 사연을 길게 늘어놓고 부적을 하나 받아왔는데, 그 도사 말로는 부적을 아주 작게 정성껏 접어서 도사가 별도로 주는 작은 종이상자에 조심조심 넣어 뒷머리 속에 감추어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부적에서 영험한 기운이 나와 정 회장 가문에 큰 복을 갖다줄 귀인을 알게 해줄 것이라고 했단다.

    교회 권사이신 남궁 여사께서는 이러한 사연을 남들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 그 도사를 저주하면서 주원 옆에서 밤을 새웠다. 자기의 불신앙 때문에 딸의 다리가 어떻게 될까 마음이 조마조마해 하면서.

    주원은 어이가 없었다.

    교회에 그렇게 열심히 다닌다면서 기껏 도사한테 가서 부적이나 받아왔단 말이지…….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내 다리 빨리 낫게 하려고 이렇게 칭칭 감아놓은 거야?

    아이고.     


다음날 집에 돌아온 주원은 씩씩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궁 여사가 옆에서 곰살맞게 굴면서 자분자분 비위를 맞추는 것도 외면한 채 쌩 찬바람을 내면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주원이 이렇게 냉기류를 내뿜는 것은 사실 어머니 남궁 여사보다는 그 인간 때문이었다. 

    주원에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어쩐지 몽땅 그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맴도는 탓 같았다. 자기가 화분 옆에서 기우뚱했을 때 그 무거운 가방만 들고 있지 않았던들 그렇게 균형을 잃고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가방이 무거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술도구들.

    마술?

    마아술?

    흥! 

    주원이 그 잘난 마술 배운답시고 태권도 도장 들락날락하다가 온 집 안 난장판에 눈사태까지 만들어놓은 것이다.

    내가 다시는 마술 배우나 봐라!

    그 웬수!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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