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직해요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을 '빨리' 배우려면 이제는 팀 바깥에서도 기회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3년차를 앞두고 제가 했던 고민은, 실무 잘 하는 PM이 아니라 진짜 일을 이끌 줄 아는 PM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였습니다. 저는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제 일의 영향력이 제품이나 시장에 즉시 반영되면서 큰 책임감을 매니징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비슷한 규모의 팀에서 일을 하게 될 것 같은데요. 팀의 규모가 작을수록 리더의 역할을 기대받는 시점은 더 앞당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태스크 단위의 문제 정의나 기획서 관리를 넘어서, 제품 로드맵을 짜는 진짜 PM 이 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더 해봐야 하는 경험이 무엇인지 떠올리다가 > 나는 왜 PM이 되었는가 톺아보다가> 나는 어떤 제품을 만들고 싶은지를 생각하다가 > ... > 저~ 멀리까지 생각을 넓히다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저에게 직업은 정말로 중요한 자아실현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내 직업을 통해 내가 바라는 세상에 가까워지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가?'가 직업 만족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요. 제가 바라는 세상의 키워드는 '풍요로움'입니다. 풍요로움을 여러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살아야 해서, 생존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좋아해서' 하는 선택이 많은 상태를 풍요로운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보따리를 다 풀어놓기에는 지면이 좁고 저의 글솜씨가 부족하여 중략합니다.) 제가 바라는 그런 상태를 제 직업과 연결하기 위해 제품 단으로 내려와 생각하다보니- 고관여 서비스에 늘 관심이 많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존에 꼭 필요하면 고민을 길게 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내 취향도 고려해야 하고, '그냥 좋아서' 하는 것에 이 정도 돈을 써도 되는지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야 하니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는 게 고관여 서비스의 특징입니다.
제가 어떤 시장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이 시점에 꼭 필요한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팀을 찾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거든요. 더불어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일하고 싶은지 뚜렷해지니, 내가 몸 담고 있는 팀의 도메인이 꼭 고관여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일의 동력을 쉽게 잃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1) 경험 정리하기
주니어 경력 PM 채용 공고를 쭉 보면서 우대 역량 공통 키워드를 뽑고 그 중에 제가 자신 있는 역량과의 교집합을 찾아서 몇 가지 키워드를 추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량을 증명할 경험 소재를 찾았습니다. 1년차 때 주 단위로 작성했던 회고도 살펴보고, 반기에 한번씩 받았던 (동료들이 써주는) 그로스 리뷰 도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고민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는데요. 바로 피그마부터 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설령 워드로 포트폴리오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문제 발견부터 정의, 가설 검증, 이터레이션 과정을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제작 시간의 70% 정도는 경험별 내용 정리에만 집중했습니다.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활용해서 내 일을 돌아보는 과정이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쉽게 타협하지 않고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해낸 경험을 돌아보며 뿌듯하기도 했고 / 일의 시작과 끝을 한번에 돌아보니 '이건 이렇게 할 걸' 싶은 것이 있어 후회가 느껴지기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성은_포트폴리오.pdf' 파일을 한 손에 든든히 얻어낸 것도 큰 성과였지만 내 일과 고민을 돌아보는 과정 자체도 참 소중했습니다.
(2) 내 가치관 돌아보기
총 3곳의 회사에서 8번의 면접을 봤습니다. 보통은 1차 면접에서 제가 지원한 포지션으로 일하고 계시는 실무자 분과 업무 역량이나 성과와 관련된 질문을 주고받고, 그 후 면접에서는 가치관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 컬쳐핏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사실 2차 면접을 준비하는 게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질문의 범위가 워낙 넓고, 가정형 질문도 많기 때문에- 인터뷰 전 '준비되었다'라는 자기 확신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직을 준비하고 경험한 첫 2차 면접에서 너무 빠르게 답변을 시작하려고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질문들을 톺아보면 거의 다 평소에 했던 생각들과 충분히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이라 더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평소에 든 생각들을 그 때 그 때 기록해두기로 했고 매달 2편씩 쓰기로 (혼자) 약속한 브런치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기록까지 할 필요 있을까?'' 싶었던 사소한 에피소드도 저에게 영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일터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중대한 프로젝트를 맡는 것 외에도 많다는 걸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목격했던 동료의 용기있는 결정이나, ABT 잘못 세팅해서 지표 망가지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바로 수정해서 재배포하느라 진땀 흘렸던 하루 등 기억 창고에서 꺼내니 한 알 한 알 나를 키운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내 나름의 직업관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2년 전에는 '나쁜 PM은 어떤 PM일까요?'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딱히 내 생각이랄 게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 대강 상상하면서 적당한 답변만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의 맥락을 소화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PM'은 PM으로서 좋은 직업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제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이 답변도 언젠가 바뀔 수 있고, 누군가의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생각한 것인 만큼 이제는 '면접관도 내 생각과 같을까, 이 답변을 마음에 들어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소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모습이 예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를 하든, 돈을 벌든, 그냥 통근길을 즐기기 위해서든 여하튼 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 앞으로는 면접 준비를 할 일이 없어도 나의 직업관에 내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자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PM의 관점에 빠르게 몰입하는 경험 익히기
이직을 준비하면서 봤던 첫 1차 면접을 망쳤습니다. '이 팀에 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막혔습니다. 면접 기본 질문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준비한 답변은 있었지만 제대로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사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면접 때 자기소개랑 지원동기만 답변을 구체적으로 준비해가고 나머지는 머릿 속에 넣어둔 경험 소재에서 슥슥 꺼내서 면접 맥락에 맞게 답변하는 걸 제 나름의 면접 스타일로 체화해나가고 있는데요,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이 팀에 올 나'에 대해서는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PM이라면 제품 제작 프로세스를 리드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스쿼드 내 타 구성원보다 입사 시기가 늦어도, 제품 로드맵 관점에서는 적어도 반 발짝 이상 앞에 있어야 하는데 팀과 제품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면접에 참여했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면접부터는 새로운 팀에서 PM으로 일하게 될 스스로를 생각해보면서 제 관점에서 제품을 해석한 후에 면접에 참여했습니다. 제품을 해석하기 위해 면접 질문의 의도부터 생각해봤는데요. 면접자에게 제품 로드맵이나 팀의 다음 스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의 의도는, 실제로 쓸 만한 계획을 내놓을 것인지는 보기 위함보다는 PM의 관점에서 제품을 볼 줄 아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기업 조사 방법은 모두 패스하고, 아래의 요소들만 집중하되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제 해석을 더해갔습니다.
<사업과 제품의 관계>
- 수익 모델 (이 팀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아야 제품이 사업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 지금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음. 수익 모델 파악에 메인 고객 이해도 포함됨)
- 수익 모델 강화를 위해 제품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 (Objective)
-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제품 지표 (북극성 지표)
- 북극성 지표의 선행 요인이 되는 제품 지표 (Key Results)
<제품의 과제>
- 퍼널별 핵심 지표
- 퍼널별 사용자 니즈
- 퍼널별 (제품팀이 풀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
그렇게, 어찌저찌 준비를 하고 이직처를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팀장님과의 면담을 마무리한 후, 가까이서 실무를 보는 동료들에게 차례차례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쉬움과 축하가 오가는 대화 속에서- 이렇게나 다정하고 유능한 동료들을 많이 만나뵈어 성취도 실패도 같이 경험해볼 수 있었다는 것이 두고두고 귀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퇴사 소식을 전한 후, 개발자 동료가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포토카드를 사서 슬쩍 전달해주셨을 때 정말로 눈물을 훔쳤습니다...ㅋㅋ)
PM으로서의 첫 커리어를, 서로 서포트하는 동료들이 있는 팀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에도 감사했고 커리어를 떠나 20대 중반에 무언가에 정말 열중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음에도 무척 감사했습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비로소 이직 과정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팀 동료로서의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저도 동료들에게 종종 생각나는 PM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쌓았던 기억을 자양분 삼아 다음 팀에서도 다정하고! 유능한! 아주 든든한! 동료가 되어볼게요. (울컥)
이제 새로 배울 것들이 많을텐데요. 그에 따라 브런치에 정리하는 글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냥저냥 기획서 잘 쓰고 제작과정 관리할 수 있는 PM이 아니라 제품 로드맵을 만들 수 있는 PM/PO가 되기 위한 여정을 담아보겠습니다.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