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도망가겠습니다] 김새봄
섬진강에서의 첫 끼니로 먹은 재첩 정식에 곁들인 막걸리에 속이 뜨겁다. 술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산성에 닿은 리트머스 종이처럼 곧바로 얼굴이 붉어지며 열이 오르는 터라 머플러 속까지 파고드는 거센 화개의 바람이 그다지 춥게 느껴지진 않는다. 어쩌면 막걸리가 아닌 속을 뜨끈하게 데운 재첩국 덕일지 모른다. 자취를 하면 정성껏 끓여낸 뜨거운 국을 먹을 기회가 흔치 않은데, 막 독립한 초반에야 이것저것 해 먹는데 재미가 들려 미역국이며 만두국이며 하는 것들을 제법 끓여댔지만 알다시피 자고로 국이란 커다란 냄비에 재료를 많이 넣고, 오랜시간 끓여내야 맛있는 것. 한 줌 미역으로 라면 냄비에 끓인 국은 간이 맞음에도 어딘가 부족한게 엄마가 커다란 냄비에서 미역만 건져 먹어도 배부를만큼 가득 퍼 주던 구수한 그 맛이 아니었다. 노력과 시간대비 좋은 결과물이 아닌지라 점점 혼자 국을 끓이는 일은 뜸해졌고 요즘은 유튜브에 한그릇 요리 레시피들이 넘쳐나기에 주식은 점점 덮밥 혹은 볶음밥에 한정된지 오래. 그러던 중 간만에 남이 끓여준 국물을, 그것도 새끼손톱만한 조개 살을 알알이 파 내는데 품이 들어 섬진강이 아니면 파는 곳도 드문 재첩국을 보니 몹시도 반갑다.
그 뽀얗고 뜨거운 국물을 사발 째 호로록 들이키고 곧바로 차가운 막걸리를 꼭 그렇게 마시면 이는 곧 빠질 것 처럼 시리고 뭉근해지지만 마셔 본 사람들은 안다. 그건 사우나에서 나와 바로 냉탕에 입수 할 때의 희열과 맞먹어 절대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 술을 못 한다 해 놓고 계속 술 얘기를 하기가 민망하다만 친한 친구와 편안한 자리에서의 한두잔 쯤은 즐길 줄 안다. 특히나 평소라면 한창 링거 대용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며 데드라인과 씨름하고 있을 시간에 반주라니, 도망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다. 평소라면 먹기 힘들 것을 마음껏 먹고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도되는 것. 해가 바로 정수리 위에 떠 있는 시간에 막걸리에 아딸딸 해진 붉을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나무랄 이가 없다. 곡주 특유의 시큼한 술냄새를 풍겨도 괜찮고 머리가 묵직해져도 해야 할 일이 없으니 어느 한적한 찻집에 조는 듯 앉아 느긋이 헛소리나 나누며 술이 깰 때 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평소라면 반잔에서 자제했을 술을 세 사발씩 그득히 채워 나눠 마신 후 머플러 속에서 실 없이 새는 웃음을 굳이 누르지 않은 채 명인의 차를 판다는 찻집에서 쓴 맛이 날 때 까지 차를 우렸다. 그러고는 화개장터에서 버섯을 충동구매하는 선영 곁을 멤돌며 어부지리로 시식용 버섯을 얻어 먹고 숙소가 있는 구례로 넘어가기 위해 택시를 타려는데 그제야 우리가 오늘 여기 와서 지나다니는 택시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카카오 택시가 될까? 어느새 도시 촌놈이 된 둘은 어플 없이 택시를 잡던 때가 전생의 일 같아져 조금 멍청히 서 구례 콜택시 따위를 검색하다가, 선영이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방금 라면과 김치를 산 슈퍼 주인 아주머니께 살갑게 묻는다.
“사장님, 저희 지금 구례로 가려는데, 여기서 택시를 부를 수 있을까요?”
사장님은 별다른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예- 낸데요, 구례 갈 수 있습니까? 예- 알겠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다른 곳으로 전화. 아마 직전에 통화한 기사님이 당장은 안된다고 하셨는지 같은 내용을 똑같이 반복해 물으시더니 전화를 끊고 우리더러 밖에서 기다리면 금방 올거라 하신다. 정확한 위치와 상호명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택시가 올까? 온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난 택시 한 대는 그 많은 사람들 중 기가 막히게 우리 앞에 정차 하더니 창문을 내리곤
“택시 부르셨지요?- 구례 가시는 손님이지요?”
신기한 방법으로 택시를 탔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랐다. 차 안에서 바라본 차창 밖은 벌써 강 위로 누르스름한 해가 기울어 간다.
차로 15분 쯤 이동했을 뿐인데 이곳은 이제 전라도란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라는 노래 가사가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 줄이야. (노래는 노래일 뿐. 조영남은 싫다.) 그러고 보니 화개에서 밥을 먹을 땐 식당 이모님들이 경상도 말씨를 쓰셨는데 택시 기사님은 묘하게 전라도 특유의 은율있고 감칠맛 있는 말씨가 묻어난다. 전라도 방언으로 화개와 구례에 대해 꽤나 깊이있는 설명을 해 주시던 기사님은 네비게이션에서 점점 가까워 오는 숙소 위치를 바라보며 “이런 데 민박집이 있습니까?” 하신다. 어르신이 보기엔 도저히 손님이 있을 것 같지도, 그래서 숙소가 있을거란 생각이 안 드는 평범한 동네에 객지에서 온 젊은 여자 둘을 내려주자니 얘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게 맞나, 의심 들 법 하지만 막걸리가 덜 깬 무딘 머리로 에어비엔비라는 어플에 대해 설명하기가 아득해져 그저 “그러게요, 있더라구요-” 하고 말았다.
하긴, 아무리 봐도 민박집이 있을만한 위치가 아닌 것 같긴하다. 화엄사와 가까운지라 관광객이 아주 없지는 않겠다만 ‘지리산 스위스 호텔’ 이라는 ‘동동주 돔페리뇽 바’ 와 같아보이는 맥락의 이름을 가진 꽤나 큰 숙박업체가 떡하니 자리해 있고 군데군데 모텔도 심심찮게 보이니 요즘 세상에 민박집은 경쟁력이 없을 터. 그러나 세상엔 이런 세속적인 고정관념을 깨는 사장님들이 항상 존재하시는 덕에 놀라울만치 우리의 마음에 쏙 들어찬 숙소가 민가 사이 파란 대문 속에 소담히 자리하고 있었다. 에어비엔비에서 ‘하동’을 검색했을 때 슈퍼 호스트의 집이라며 상위에 뜬,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나올 법한 예쁘장한 시골집엔 섬진강과 지리산이 좋아 짐싸들고 내려와 살기 시작한지 8년이 지난 주인 내외와 귀여운 강아지, 그리고 고양이가 있단다. 리틀포레스트의 팬인데다 소문난 개 어멈이자 동물 박애주의자인 나는 사나운 강아지가 있대도 좋을 판에 무려 ‘귀여운’ 강아지, 거기다 고양이까지 있다니. 이건 도망을 가는게 아니라 천국으로 뛰어드는게 아닐까. 다행스레 선영도 동물에게 꽤나 호의적인데다 이 집을 마음에 들어했다. 사사로운건 정반대일지라도 의식주에 있어서는 꽤나 합이 맞는 우리는 숙소 예약 가능 날짜에 우리의 도망 일정을 맞췄고, 섬진강을 다시 보는 것 만큼이나 이 집에 들어설 나날을 기쁘게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이 곳, ‘섬진강 댁’. 설레는 마음으로 눈 시리게 새파란 대문을 밀자 집의 전경을 눈에 담기도 전에 우렁찬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누런 털뭉치 하나가 자갈 깔린 마당을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세상에 예뻐라, 우리 복이보다 딱 두배정도 클까. 네 발로 서면 키가 내 무릎까지 오고 두발로 서면 그 앞발이 골반쯤에 닿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녀석은 한쪽 귀는 쫑긋 서 있고 반대편 귀는 감자 수제비 처럼 납작 접혀있는 것이 몹시도 사랑스럽다. 21세기 대부분의 강아지가 그러하듯, 이놈도 도둑이란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라 집을 지키는 의무따윈 처음부터 짊어진 적 없는 모양인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낯선이가 그저 반가워 바게트 빵만한 꼬리를 붕붕 흔들며 시종일관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이모도 정말 반가워-! 그런데 너도 집 지키긴 글렀구나” 선영이 주인이 자리를 비운 숙소 내 우리가 묵을 별채의 도어락과 고분고투 하는 동안 자갈밭에 주저앉아 녀석의 뻣뻣한 털 사이로 열 손가락을 모두 집어 넣고 북북 긁어주고 있으니 바짓단 밑으로 드러난 발목에 쓰다듬고 있는 이 강아지의 털보다 확연히 부드럽고, 뼈대가 가는 생명체의 몸이 스쳐지나간다. 깜짝 놀라 아래를 보면 예쁜 체다 치즈 빛 고양이 한마리가 털보다 더 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간드러지는 인사를 건낸다.
나, 정말 천국에 온게 맞나봐.
주인 내외와 통화가 닿은 선영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별채 문을 열자 이 놈들이 ‘니들은 이 추운 날 왜 이제야 문을 여냐’는 듯, 발랄하게 크기가 다른 두 꼬리를 흔들며 먼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쟤네가 방 안에 들어와도 되나? 나야 환영이지만 이 집엔 털난 친구들은 손님방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동물들이 뭘 하든 그저 예뻐 흙 발로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면, 선영은 위생에 있어선 아주 관대한 마음씨를 가졌기에 별 상관 없다는 주의다. 허허- 그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강아지와 고양이가 방에 함께 있어도 되겠냐 물으니, 수화기 너머에선 손님들이 워낙 오냐오냐해 방에 들어가는게 버릇이 됐다고, 우리가 괜찮으면 상관 없으시단다. 그럼 같이 있어야지. 당장 한 놈씩 안아들어 물티슈로 여덟개의 따끈말랑한 발바닥들을 싹싹 닦였다. 먼저 풀려 난 녀석부터 분주히, 내려놓은 우리의 짐에 코를 박고 탐색을 시작한다.
짐 검사를 녀석들에게 맡겨두고 내부를 둘러봤다. 누구의 감각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여성 사장님일 것이다. 별채 내부에 직접 뜨신 뜨개 소품이 많았는데 하나하나 색감과 문양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완급조절이 참 잘 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터라 어떤 공간에 들어서면 가구와 소품, 인테리어 등을 주의깊게 분석하는게 그저 습관이자 직업병 같은 것이니 평가가 아님을 미리 밝힌다. 아무튼, 벽지, 바닥, 가구, 가전은 물론 쟁반 덮개나 창틀 위 바오밥 나무 공예품 하나까지 섬세한 안목을 거쳐 공간에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향토적이기 보단 목가적이다 라는 표현에 가까운 서정적이며 포근하고 아늑한, 정적인 작은 집. 보통 세부 요소 하나하나에 주의깊게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전체를 보는데 소홀해져 과해지거나 한 곳만 튀기 쉬운데 이 집은 각자가 ‘적절한’ 선에서 ‘적당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하나의 그림이 되기에 아카펠라 그룹의 화음 처럼 아주 편안하다.
이 모든것이 적당한 집의 나무 창 격자 사이로 때마침 오후의 겨울해가 쏟아져 들어와 맞은 편 흰 벽에 곶감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느리게 설정해 둔 메트로눔처럼 진자운동을 하는 그림자는 분명히 움직이나 소리없이 고요해 마치 움직이는 사진같다. 그 초현실적인 광경 아래로 아주 이후론 잊고 살던, 그러나 요즘은 레트로 열풍의 영향인지 sns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둥근 양은 소반이 기대져 있는데 그 중앙의 촌스러운 꽃무늬마저 지금 이 시골집을 위해 인쇄 된 듯 잘 어울린다.
“위스키 한 잔 해야겠다.”
선영이 중얼거렸다. 적절한 타이밍이란 생각을 했다. 위스키를 잘 모르지만 위스키 빛이 가득찬 이 나른한 오후를 그 술 한잔이 완벽한 마침표를 찍을테다. 선영은 가방 속에서 상의에 둘둘말린 병을 꺼내왔다. 그 애가 아일랜드 유학시절 맛 들였던 브랜드의 그것이 아니라 내내 서운해 했지만 이것도 꽤나 괜찮으니 마음에 들거란다. 글쎄, 위스키라곤 어학연수 홈스테이 호스트에게 얻어마신 캐나다 위스키와 어쩌다 친한 언니를 따라 방문한 바에서 맛 보라며 내어 준 몇 잔이 다인 내가 그 맛을 알까. 전문가가 맛있다니 촌스러운 티를 안 내려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말아야지. 선영이 위스키를 준비하는 동안 곶감이 늘어진 창 바로 앞에 있는 식탁겸 바에 잔과 간단한 안주를 마련했다. 우리가 반했던 양은 소반을 쓰지 못 한 이유는 신이나 방 안에서 운동회를 하고있는 노란 털뭉치 둘에게 그 상이 머지않아 교통사고를 당할 거란게 뻔해서.
선영이 직접 준비해 온 작은 잔 속 황갈빛 술에선 묘하게 달큰하고 중후한 향이 피어오른다. 술은 그저 원 샷인 줄만 알아 아무 생각 없이 한번에 잔을 비우자 목구멍은 순식간에 뜨거워지고 “그거 그렇게 마시는거 아니야!’” 경악 섞인 말 끝에 나의 촌스러움이 드러나고 만다. “아 그래?, 어쩐지..... 지금 목이 탈 것 같다” 도수 높은 알콜에 다시 얼굴이 붉게 올랐다. 마치 빨간 팬더같아 보이는 나와 원래도 양 볼이 발그스름한 선영이 마주앉아 간간히 따끈한 위스키를 홀짝이며 오후 내내 나근나근 이야기를 나눴다. 열일곱에 처음 만난 아이과 스물일곱이 되어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그 처음과는 많이 다르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겁던 시절과 이제 낙엽이 구르는 걸 보면 슬슬 겨울 난방비 걱정에 온수매트를 살지말지 고민해야 하는 시절은 분명히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선영은 결혼 얘기를 꺼냈다. 그럴 때가 왔구나. 슬슬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스럽지 않은 주제다. 그렇다고 선영이 결혼을 한다는 건 아니고, 그 애가 결혼을 하고싶은 이유와 내가 결혼을 하고싶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영은 타지 생활을 오래 하며 가족이란 존재에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됐단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 애는 하루가 끝나고 집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둠과 적막 대신 온기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내 편이자 가장 좋은 친구인 가족이 자신을 반겨 줬으면 한단다. 선영과 반대로 나는 가족과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며 심리적으로 더 가까워졌고, 하루가 끝나고 집의 현관을 연 순간부터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길 원한다. 타인과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얻는 사람과 홀로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의 차이랄까. 물론 본가로 내려가 가족과 함께있을 때의 내가 얼마나 안정적이며 심리적인 든든함을 느끼는지를 알기에 가족에 대한 선영의 열망을 이해하고, 선영 역시 혼자 있는 시간 속 개인의 사유와 자유, 온전한 집중을 겪어 봤기에 비혼과 독신주의인 나를 이해한다.
이렇게나 다르지만 지난 10년간 잘 지내온 우리는 다시 10년을 잘 지낸 후에도 마주 앉아 또 서른 후반에 나눌 법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 때 나와 마주한 선영에겐 가족이 생겼을까? 어쩌면 내 앞엔 선영 말고도 그녀의 가족이 함께 앉아 있을지 모른다. 선영의 아이가 그녀의 무릎에 앉아 있을 때, 내 무릎엔 개가 앉아 있으면 좋겠다.
부엌을 꽉 채우던 해는 어느새 거의 넘어가 여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겨울 해는 빨리 기우니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있는 중, 이야기는 그만하고 저를 좀 보란 듯 스툴에 앉은 내 무릎위로 개가 머리를 올렸다. 그게 사랑스러워 아까 전화로 사장님께 들었던 ‘빵’ 이라는 어울리는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자 커다란 꼬리는 붕붕 흔들리고 양쪽 귀가 뒤로 젖혀진다. 털이 수북한 입엔 하얀 봉제인형이 물려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파우치에 달려있던 내가 퍽이나 아끼는 아기 백조 인형. 사람 눈에 귀여운건 개 눈에도 귀여워 보이는지 열심히 짐 가방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녀석이 빛나는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백조의 배를 코로 쿡쿡-찔러댔다. 저 순진한 눈. 인형이 갖고 싶다는 마음 말곤 아무런 사심이 없는, 유리알 같이 맑은 눈. 무언가 원하는게 있는 강아지의 눈을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알거다. 그 눈은, 세상 가장 거절하기 힘든 것 중 하나란걸.
모든 개의 눈은 순진하며 무구하다. 나쁜 생각이라곤 친구의 간식을 빼앗아 먹거나 남 몰래 빨래 바구니에서 양말을 훔쳐 올 궁리 정도가 다인 생명체니 그 눈이 탁할리가. 그 작고 말간 눈에 오롯이 내가 담긴 걸 마주할 때면 경외감과 감사함이 피어오른다. 세상 어떤 존재가 나를 저렇게 예쁜 눈과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봐 줄까. 어떻게 너희는 종도 생김새도 언어도 모두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눈빛을 내어 줄 수 있는걸까.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래서 개를 사랑하며 자주 개에게로 도망친다. 작은 사랑을 주면 온 마음을 다 한 사랑으로 돌려주는 존재들. 맹렬히 짖다가도 손을 뻗어 머리를 한 번 쓸어주면 그 행위 하나에 취약점인 배를 허락하고 꼬리를 흔드는, 복슬복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끌어 안으면 사람보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주는 생명력이 그대로 전해지는 털뭉치들
어떤 말도 지친 어깨를 토닥여 줄 수 없을 땐 본가로 가 개를 끌어 안았다. 특유의 꼬순내와 사람보다 훨씬 명랑한 심장박동, 작은 근육이 규칙적으로 끝없이 뛰는 소리만으로도 지끈거리는 편두통이 가라앉았다. 그 부근을 가만가만 도닥여 주고 있으면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치지 않았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새카만 두 눈은 놀랍게도 다 이해한다 말하고 있다. 자그마한 머리는 무엇이 힘든지, 어떤 일이 속상하게 만든건지 따위의 세세한 이유들을 알 수 없지만 커다랗고 순도 높은 사랑에 기반한 공감으로 그 이유까지 감싸 안아주는 것이다. 녀석은 슬픔의 이유를 캐묻지 않고 극복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슬프니 자신도 함께 슬퍼함으로 위로해 줄 뿐. ‘네 맘 다 알아, 괜찮아, 슬프지 않을 때까지 내가 옆에 있어줄게’ 오도카니 앞에 앉아 순하디 순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하는, 맥락을 알지 못하는 감정까지 기꺼이 함께 나누고 안아주는, 작은 몸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사랑. 겨우 나 따위를 이 선한 존재가 그토록 사랑한단 사실은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날 힘을 준다. 단언컨대 그 사랑을 받아 본 자는 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줬다. 열쇠고리용 솜인형 치고는 꽤나 비싸게 주고 산 나의 소중한 아기 백조 인형을. 생전 처음 보는 낯선이를 온몸으로 환영해 주고 곁을 내 주는 선한 마음에 겨우 그 인형이 들어 찼다는데 줘야지. 고민없이 군번줄을 열어 인형을 빼 주자 안 줬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을만치 하루종일 잘 가지고 논다. 입에 물고 등을 방바닥에 비비고, 앞발로 툭툭 건들였다 다시 코로 쿡-찔러보고. 핥고, 던지고, 다시 주워오고, 뜯는다. 저게 뭐라고 저리 좋을까. 어떤 마음을 가졌으면 손바닥만한 인형에 하루가 저리도 재미날까.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개의 머리를 긁어 주고 있으면 사뿐한 소리와 함께 고양이 ‘별이’가 바 위로 뛰어 올랐다. 날래고 빠르지만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고,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곁에서 치대는 개에 비해 홀로 사유하는 시간을 즐기며, 맑고 순진한 개의 눈과는 달리 맑고 고요한 눈을 가진 신비한 생명체. 기분이 좋으면 구룩구룩 요상한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이걸 ‘골골송’이라 부르던데, 내 귀엔 도무지 골골 소리가 아닌 그 노래를 귀를 긁어주는 손길에 맞춰 별이가 구륵-구르륵- 부른다.
창 밖은 이제 완전히 저물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에 채에 친 밀가루 같이 부슬부슬하고 입자가 고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이 오지 않는 곳에 사는 내가 멀리 도망을 와서 본, 올해의 첫 눈이었다. 위스키가 식어가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각각 무릎과 팔을 차지한, 완벽한 도망의 첫날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