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되는 순간을 사랑하고 붙잡는 기술
2026년 3월 30일 발행된 뉴스레터 <낯선 어휘집>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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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요. 분명히 느꼈는데 차마 말이나 글로 옮기지 못한 감각, 풍경, 생각들은 존재감 없이 흘러가죠. 어떤 것들은 그저 ‘좋다’거나 ‘싫다’로 뭉뚱그려지기도 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단어를 대입하다 보면 일상이 풍부해져요. 구름은 모두 '구름'이지만, 솜사탕을 찢은 모양의 새털구름, 동글동글한 양떼구름, 수직으로 뽀송하게 쌓인 뭉게구름 등으로 불러보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빨주노초파남보의 빛깔로 나누는 거죠. 같은 빛이지만 후자는 우리를 더 알록달록하게 만들어주니까요.
<이번주 낯선 단어>
명지바람: (명사)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이번 주 낯선 단어 '명지바람'을 사용한 글을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산문집을 내고 싶다. 하나하나 신중히 고른 단어들이 날 서지 않고 어우러지는, 고요하고 침착한 문장을 읽다 보면, 경이로운 존경이 터져 나온다. 동공이 흔들릴 지경으로 샘이 날 때도 있다.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산문집에 반해 오랜만에 책을 샀다. 이런 글에게는 협소한 책장의 한편을 기꺼이 내어주어도 괜찮다. 소유하고 싶기보다는 훔치고 싶어서 그랬다. 글을 통째로 가지면 재능을 훔칠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으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봄으로 걸어갔다. 나의 뭉개진 태도나 온기가 묻은 선물, 무화과나무 그늘에서의 아침 식사처럼 쓰고 싶은 이야기도 가득 품었다.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소한 밥 냄새가 퍼지는 어린이집 옆 벤치에서 책을 펼쳤다. 곧 터질듯한 단홍색 철쭉의 봉오리와 귀 옆을 쏜살같이 훑고 지나가는 새의 발랄한 지저귐이 한창 봄을 빚고 있었고, 곧 명지바람이 얇게 스쳤다. 살갗에 겹겹이 붙는 공기층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는 삶의 감각을 형용하고 싶어 글을 쓰는 게 아닐까. AI가 갖고 있지 않은 삶과 감각을 담고 싶어서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글을 쓰는 재능은 물성을 파헤치는 집요함이 아닐까.
언젠가 훔치지 않은 문장을 쓸 수 있겠지. 그날의 삶과 감각으로.
저는 트렌드와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유행을 누구보다 앞서 누리고 싶어서 바쁘게 스마트폰을 뒤적이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너무 빠른 변화의 속도에 피로감이 커서 제 속도대로 걷고 있어요. 범람하는 유행에 빠져있다 보면 시간은 잘 흐르지만 불행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작년부터 일상을 조금씩 바꿔나갔어요. 최신 유행곡 비트 대신 라디오 DJ가 읽어주는 사연을 듣고, 소셜미디어 앱에 7분 이용 제한을 걸고, 이동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가끔 집중 거리가 필요하면 뜨개질도 해요. 이런 물건들을 모두 담으려면 큰 가방이 필요해 하나 샀죠. 후후. 그런데 저 같은 분들이 꽤 있나 보더라고요. 뜨개질, 퍼즐, 스도쿠 같은 아날로그 취미를 담은 아날로그 백이 인기라니 반가운 소식이에요.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 부는 날에는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아날로그 백과 외출하면 어떨까요? 우리 몸에 물리적으로 닿는 오감에 집중해 보는 거예요. 까만 화면 속 계절감을 잊은 남의 인생은 잠시 덮어두고, 지금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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