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11일
날짜도 잊히지 않는다.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다. 아마도 내 눈에 보이는 저건 태평양임에 틀림없다. 제주도나 일본까지는 가본 적이 있었어도 태평양을 건너는 건 처음이다.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유학 결정부터 자퇴까지.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이 비행기 안에 있는 내 모습, 불과 한두 달 전 막 1학기 기말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다.
친한 친구들은 물었다.
왜 떠나는 거야? 대학은?
제법 공부를 잘했다.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죽을 쑤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소위 전교에서 놀았고, 공부하고 노래방에서 락발라드로 스트레스를 푸는 그냥 그런 소년이었다. 그런데 대답을 못했다. 그러게, 나는 왜 떠나는 거지? 캐나다에 누구 아는 사람 하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항상 '이유'를 찾고, '근거'를 찾는다. 뭔가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논리적이지 않고, 정당성이 없다는 이유일게다. 하지만 떠나는데 이유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나에게는 캐나다로 떠나는 명확한 이유나 목적이 '전혀'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나에게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냐는 것.
잘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태평양 너머로 유학을 간다는 것.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을 나는 너무도 쉽게 해 버렸다. 누군가는 내가 도피유학을 간다며 손가락질했고, 누군가는 분명 실패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이해한다. 그럴 수도 있다. 완벽하게 실패하고 돌아와 독서실에 처박혀 조용히 수능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을 결정하는데 그런 '망할 수도 있다는 가정'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우연히 기회를 얻었고, 나는 정확히 10초 만에 유학을 결정해 버렸다.
전혀 금수저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지방 촌놈이 유학이라는 큰 결정을 너무 쉽게 했다는 것을 혹자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에겐 돈도 없고, 빽도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앞뒤 재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계속 되뇌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긴장을 많이 한 듯하다.
토론토 국제공항까지 앞으로 6시간.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잠이 온다. 일단 한숨 자야겠다.
이제는 제법 오래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200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2012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고, 다시 2017년에 캐나다로 돌아왔으니, 그때 비행기 안의 나는 이런 여정을 예상이나 했겠는가.
처음 캐나다로 떠났던 그때 나에게 중요한 건 영어도, 학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답을 찾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캐나다생활에서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했고, 나름대로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
솔직하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고, 나이를 꽤나 먹은 지금 아마도 끝까지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중요한 건 답을 찾으려는 주체가 나 자신인지, 그것이 확실한가 하는 점이다. 처음 떠났을 때 열여섯 소년은 적어도 지금보다 겁은 없었던 것 같다. 세상을 모르고 겁이 없었기에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 어린 패기와 무모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요즘이기도 하다.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시절 나의 모습을 그저 어렴풋이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기억하고 되뇌며 복기하게 위해, 그 시절의 나에게 배워야 할 것들을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배우기 위해 용기를 내어본다.
202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