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고찰
-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 바라본다는 것은 정의한다는 것
- 양 극단에서 세상을 바라본 플라톤과 노자
- 중용의 시선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세상만사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누군가 묻는다면 쉬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얼추 대답을 하곤 한다. 뛰어난 지성이나 석학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특히 연륜이 있거나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옆집 할아버지도, 구멍가게 아주머니도, 사우나에서 마주한 생면부지의 아저씨도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응, 세상은 말이지...” “사는 게 뭐 별거 있냐, 삶이란 바로 그런 거야...” “세상은 그런 거야. 너도 다 알게 될 거야.”
그들은 어떻게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시선’과 관련이 있다. 시선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실 ‘바라본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라본다는 것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사전적 정의로도 ‘바라보다’는 동사에는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자신의 시각으로 관찰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관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과 관조가 끝이 아니다. 인간은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지각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정의定義를 내린다. 내가 바라본 세상은 이러한 것이라고.
세상을 정의하는 것,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한층 더 진보된 행위이다. 세상을 하나 둘 정의하며 조금씩 세상을 인식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한 나름의 정의들을 갖고 있다.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우정과 사랑에 대하여, 예술과 심미에 대하여,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국가적 문제에 대하여, 외교적 문제에 대하여, 그리고 신에 대하여. 물론 무언가에 대해 확실한 견해를 피력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아직’ 정의 내리지 않은 것일 뿐, 파고들면 사실 그들 또한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세상에 대한 시선, 견해, 정의는 결코 개인적인 영역에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의견을 듣고, 타인의 견해를 읽고, 타인의 시선을 헤아리면서 자신만의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과연 그런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면서 시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선은 취사 규합으로 완성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궁금해한다. 유명인사의 토크쇼나 기자회견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무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에게 무엇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선, 바라봄의 문제라기보단 그보다 한 단계 나아간 정의의 문제이다. 사실 시선에 대해 물어본다 해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의의 영역이니 말이다. 타인의 시선 그 자체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시선을 통해 나타나는 정의를 통해 역으로 시선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세상을 인식해나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연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 내린 사람이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만물에는 이데아, 즉 영원하고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만물에 잠재되어 있는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상기설이다. 선, 도덕, 아름다움, 진리, 그리고 사람은 물론 국가까지 모든 것이 이데아적인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오직 세 계급의 인간만 있다고 단정 지었다. 국가의 생산을 담당하는 평민과, 국방을 담당하는 전사, 그리고 통치자 계급인 수호자가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이 이처럼 인간을 세 계급으로 나눈 것은 인간의 영혼이 서로 세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욕망, 기개, 이성이다. 그리고 이 세 개의 영혼은 각기 다른 세 개의 덕인 절제, 용기, 지혜로부터 발현되었다. 즉 절제의 덕을 가진 욕망의 영혼은 평민 계급이 되는 것이고, 용기의 덕을 가진 기개의 영혼은 전사 계급이, 지혜의 덕을 가진 영혼은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의한 세 종류의 인간 이외의 다른 인간은 없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인간을 정의(한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국가까지 정의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정의한다. 평민, 전사, 수호자의 세 계급은 각기 자신의 영혼에 어울리는 생산, 국방, 통치일에 종사한다. 국가는 수호자 중에도 가장 훌륭한 덕을 가진 이른바 '철인왕'이 통치한다. 도시의 거주 구획은 동심원 형태로 퍼져나간다. 누구나 같은 크기의 집에 살고 동일한 배급품을 받는다. 언제나 식사는 모두 함께한다.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으면 시민 모두가 부모가 되어 함께 기른다. ‘인구 생산’을 위하여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들의 공동 아내가 된다. 혹세무민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예술작품의 창작을 금지하고, 학문의 체계적 확립을 금지한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국가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세상 모든 것에 정의를 내렸다. 그는 자신이 정의 내린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정의를 내리자 시라쿠사로 떠난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철인왕으로 만들고 시라쿠사를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세상은 그가 바라보았던 것처럼, 정의한 것처럼 전혀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벌써 알아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플라톤이 그린 청사진은 사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모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의 철학자들은 플라톤을 파시즘의 원형을 제시한 철학자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하는 것도 모자라, 세상을 자신이 보고 인식한 그대로 만들고자 했다. 그처럼 세상을 정의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잘 피력할 줄 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단단하다. 자신의 관점과 견해를 타인에게 주입시킬 수도 있고, 토론을 한다 해도 쉽사리 지지 않을 논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바라보고 정의한 것을 넘어 그것을 체계화시킨다. 시선이 논리(학문)의 영역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완고하게 세상을 바라본 나머지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확정 지어 버린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들의 정의定義가 정의正義이기에.
세상에 정의를 내리고 쉽게도 확신하고 그것을 완고하게 믿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지난 세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에 도취되었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맹신하는 사상 앞에서는 사랑도, 가족도, 역사도, 전통도, 도덕도 파괴해버린다. 굳이 그들을 예로 들지 않아도 된다. 간혹가다 자신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 완고하게 세상을 정의한 나머지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확정 지어 버린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꼰대’ 스타일을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의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 여기에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하지 않으려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초나라의 철학자 노자이다. 당시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던 주나라가 쇠하게 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은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춘추전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승자가 패권을 차지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것은 비단 권력자뿐만이 아니었다. 사상 또한 그러했다. 어떤 사상이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 사상들도 각축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춘추전국 시대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이자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 일컫는 것이다.
노자도 바로 이 각축장에 등장한 철학자이다. 도가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도(道)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도라고 할 수 없다.” 즉 도덕이니, 윤리니, 정의니, 군주의 자질이니, 국가의 청사진이니 모든 것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무위자연으로 대표되기도 하는데, 만사를 정의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자연의 이치를 따라갈 것이라는 논리다. 일례로 군주는 언제나 강과 바다처럼 몸과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법조차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하늘의 그물이 엉성한 것 같지만 불의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플라톤의 모든 것을 다 정의하려고 했던 철학과 반대로, 노자는 모든 것을 정의하지 않으려 했다. 과연 노자의 사상이 플라톤의 사상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과연 도덕도, 법도, 질서도, 규율도 없는 곳에서 살기 좋은 세상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그곳에는 무질서와 혼돈뿐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제자백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냉혹한 현실 처세술과 정치철학을 담고 있던 법가였던 것이다. 반대로 플라톤의 세상은 압제와 탄압뿐이다. 플라톤이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던 파시즘과 나치즘의 말로는 끔찍하게도 대학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타협의 여지도 없는 플라톤의 시점을 바라보았다. 또한 일체의 정의를 부정하는 노자의 시점도 바라보았다. 언제나 늘 그렇듯 극단에 치우치면 비극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극단으로 경도되지 말자. 아무래도 답은 하나뿐인 것 같다. 우리의 시선은 정의하며 한편으로 유보하는 플라톤과 노자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생각하자. 그리고 정의하자.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길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