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어느 젊은 소설가의 어리석은 낭만에 대하여

by 이우

모로코에서 살 때였다. 당시 내가 했던 것이라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리고 여행뿐이었다. 어느 날, 확신과 애정을 쏟아낸 소설을 출판사로 보냈다. 보내고 또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숱한 거절뿐.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별로라는 것을, 형편없다는 것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은 다름 아닌 센강에서 소설을 태워버리는 것. 목 끝까지 차오른 체증을 말소시키고 새로운 소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문서 파일을 삭제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낭만적인 의식을 원했던 나는 퐁뇌프 다리가 보이는 센강 둔치로 향했다.

강물을 바라보며 원고 뭉치를 꺼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원했던 그림이었다. 센강의 물결 속에서 일렁거리는 파리의 야경, 쓸쓸함을 더하는 매서운 겨울바람, 먹먹하게 아름답기만 하던 퐁뇌프 다리의 야경.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타오르는 나의 어리석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기대일 뿐이었다.



DSC07924.jpg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떠났던 그날의 파리. ©2017, leewoo
DSC08081.jpg 하얗게 불타올랐다. 요란한 이목을 끌며. ©2017, leewoo



연소의 과정에는 언제나 연기가 나기 마련이다. 페이지가 많았던 원고는 불이 붙자 매캐한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연기 자욱한 방화를 구조 신호로 여겼던 것일까. 사람들이 다가와 물었다. 무얼 하는 거냐고. 술이 필요하냐고 주머니에서 포켓 술병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곁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도, 연기를 보고 경찰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요하고 장엄한 의식을 원했건만 요란한 이목이 집중되고 말았다. 타오르는 불꽃, 자욱한 연기, 몰려드는 시선. 정신을 차려보니 해괴망측한 범법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방화범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파리는 나만의 파리가 아니라는 것을. 파리는 이곳 시민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서둘러 원고 뭉치를 밟아 불을 껐다. 다행인 건지 원고는 온통 회색의 재로 변해있었다. 강물에 재를 뿌렸다. 자리를 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호텔로 돌아가며 다짐했다. 세상에 함부로 나의 낭만을, 그것도 요란하게 드러내지 말 것. 그리고 또 다짐했다. 낭만을 드러낼 때는 요란한 불꽃이 아닌 희미하더라도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등대의 빛이 될 것. 매캐한 연기가 아닌, 따스한 온기를 발산할 것. 나의 의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코 끝에 겨울의 정취가 물씬 느껴질 때면 그날, 센강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의 다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곱씹어 본다. 아, 미성숙한, 나의 낭만에 대하여.



DSC00838.jpg 그날의 다짐에 대해 생각해본다. ©2017, le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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