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둠을 잃어버리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도착한 한여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저녁시간이 지났건만 해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대낮처럼 밝던 하늘은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노을을 물들이며 붉게 타올랐다. 이윽고 찾아온 어둠. 하지만 어둠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벽 두 시쯤 되자 다시금 태양이 떠올랐다. 어둠에 잠긴 시간은 고작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러시아 친구는 이것이 바로 백야(白夜) 현상이라고 알려주었다.
백야 현상, 위도 48도 이상의 북반구 지방에서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대낮같이 밝은 하루가 지속된다. 과학적으로 규명된 자연현상은 하나의 명제가 된다. 대륙판이 충돌하면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여름철이 되면 북반구에서 백야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명제를 이해하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지진과 해일, 폭풍과 토네이도의 발생 원인을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마주했을 때 과연 태연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백야 현상을 목격한 나 역시 놀라고 말았다. 고작 두 시간의 옅은 어둠을 제외하면 종일 눈부신 하루가 계속되었다. 두 시간에 두 번이나 목격했던 노을. 일몰과 일출 사이에 거리를 돌아다니던 나는, 마치 하늘에 노을이 지속적으로 떠 있던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어둠을 맞이하긴 했었던가. 불가피한 자연현상을 일주일 동안 마주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체리듬이 완전히 망가진 듯 피로가 축적되었지만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문득 어둠이 자욱한 밤이 그리워졌다.
밤이란 무엇인가. 밤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지면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는 보통 이에 맞춰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이제 주위 사람들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거나, 술 한잔 기울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노래해야 할 시간이다. 이성은 서서히 잠에 들고, 감성이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우정과 사랑, 혹은 고독과 예술이 싹트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끽한 뒤에 피로에 지친 육신을 침대에 뉘일 시간이다. 밤의 리듬에 어느새 꿈속으로 빠져든다. 태양빛이 사라지면 우리는 낮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다면 어떠한가. 일과를 끝마쳤는데도 주위가 환하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과 예술을 속삭여야 할 시간인데도 너무나 밝다. 잠들고 꿈을 꾸어야 할 시간인데도 여전히 밝다. 활력에 가득 차 있던 대낮의 생체리듬이 새벽까지 지속된다. 내가 놀랐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밤이 무색해져 버리는 것이다. 거리는 새벽이 밝아오는데도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생기 넘치는 백야가 좋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지치고 말았다.
밤이 그리웠다. 온 세상이 하루 종일 밝고 활기찼지만 견딜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아, 얼마 만에 맞이하는 어두운 밤이란 말인가! 망각하고 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밤을 있는 그대로 만끽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반드시 어둠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온종일 찬란한 빛 속에 있다면 우리는 그 광명 속에서 눈이 멀고 말 것이다. 이 짧은 깨달음은 빛과 어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도, 기쁨도, 사랑도 모두 상반되는 것들에 의한 대비 때문에 더 아름답게 빛이 나는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백야가 계속되는 유월과 칠월에 백야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그렇다. 백야는 이벤트처럼 잠시 찾아올 때야 비로소 축제가 되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백야는 형벌과 다름없는 것이다. 인간은 극단이 아닌 경계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현자들은 언제나 중용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는지. 오직 광명만, 기쁨만, 사랑만을 바라는 자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라! 그리고 축제 속에서 작은 형벌을 만끽해보라. 빛 속에서 어둠이 그리워질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