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에 대하여

절대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by 이우

내 나이 서른. 종종 놀라운 소식들을 접하곤 한다. 오랜만에 절친에게 연락이 왔다. 그간 자신의 소식을 전하던 그는 자연스레 고백했다. 자신은 이제 크리스천이 되었노라고. 교회 사람들이, 목사님이, 교회가, 신의 섭리가 좋아졌다는 친구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는 학창 시절 나와 함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며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비행을 일삼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한참 동안이나 친구를 생각했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신을 절대 부정하던 친구는 어째서 신을 믿기 시작한 것일까. 깊은 내막은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헤아려볼 수는 있었다. 학창 시절 우리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무모했고,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이란 나약한 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다. 또 꿈은 컸던지라 우리는 언젠가 세상을 바꿀 것이며, 마침내 서로가 꿈꾸는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의 어느 날, 서로의 길을 나아가며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되자고까지 다짐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신을 믿는다니.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조소의 웃음이 아닌 공감의 미소였다. 서른 살의 나도 언제부터인가 성경에 손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 십 년의 세월 동안 세상을 바꾸느라 지쳐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우리가 어린 시절 생각했던 것처럼 호락호락하지도 않았으며, 우리는 또 그리 강인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꾸자며 십 년 동안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렇게 기독교의 세계에서 또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어느 무슬림. 이란, 이스파한에서. ©leewoo, 2017




나는 언젠가부터 신을 믿는 사람들이 부럽곤 했다. 신을 독실하게 믿는 이들에게서 어떤 단단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 앞에서 겸허히 무릎 꿇으며, 헌금과 십일조로 자신의 믿음과 정성을 표시한 이들은 사회생활에 있어 분명 자신감이 있었다. 신을 믿음으로서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죄의식, 의구심과 불안감을 온통 신에게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런 강인한 기질은 흔히들 말하곤 하는 ‘하느님 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굳이 강인함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분명 신을 믿는 이들에게는 자기 확신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에 찰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그들이 부러웠다.

사실 그들을 보며 느꼈던 것은 부러움보다는 경멸감이 먼저였다. 지난 이십 대의 시절, 신을 부정하기 위해 니체의 철학에 심취되었다. 니체는 말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라는 거미줄에 걸리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영원히 거미줄에 걸린 채 세상을 고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시야’ 밖에 갖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나는 거미줄로부터 열심히 도망치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바라보며 경험하고 싶었다. 신앙을 가진 이들을 어리석은 양 떼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은 황야의 이리가 되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른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신앙에 대한 허무주의를 견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 스스로가 그리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십 대 시절, 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어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인간 본연의 두려움, 죄의식, 의구심, 불안감 이 모든 것을 능히 짊어졌다. 하지만 세상의 그 무거운 짐을 모조리 견인할 수 있는 것은 지치지 않는 젊음뿐이었다. 젊음이 조금씩 시들어가며 그 버거움을 조금씩 느낄 때 즈음, 나는 성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성경을 직간접적으로 접해나갔다. 성경 원문을 읽었다. 성경을 모티브로 하거나 주제로 삼았던 주제 사라마구, 존 밀턴, 토마스 홉스, 허먼 멜빌, 다자이 오사무, 이문열의 문학작품들은 내게 성경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문학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자연스레 친숙해져 갔고, 성경을 통해 기독교 세계는 점점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은 믿음과 신앙이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 지극히 문학적이었고, 여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세계일 뿐이었다.


아직 믿지 않는다. 이것만이 친구와 나의 큰 차이였다. 불신앙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무모했음을 깨닫곤 기독교의 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하나는 믿음으로, 또 하나는 문학적으로 접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신이라는 절대자의 존재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다. 싱그럽게 젊었던 시절, 나는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을 기대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자신감으로 넘쳤던 나는 모든 것을 능히 짊어지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젊음이 한풀 꺾인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종종 버거울 때가 있다. 이제 신이 필요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직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을 유보하고 있다.

내게 기독교의 세계는 탐구하고 싶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내게 사람들은 묻는다. 기독교인이냐고. 아, 세상의 고정관념은 이런 것이다. 나는 주위에 널린 기독교인들 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믿음이 전제되어버리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달리, 내겐 성경은 여전히 문학적인 접근일 뿐이다. 보카치오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신성한 책이기 이전에 문학가들에 의해 쓰인 문학작품이라고. 그의 말을 여태껏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기독교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눈앞에 펼쳐진 기독교의 세계를 두고도, 신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면서도 믿음과 신앙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불안에 잠을 뒤척이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 끝없는 불안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신을 믿으면 단번에 해결될 것 같지만, 아직 신을 믿고 싶지는 않다. 성경이라는 인류 최고의 고전을 아직 다 읽어내지 못했기에. 내게 신앙이란 저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문득 죽음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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