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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Jan 05. 2019

정찰제의 세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 것

모로코, 페스의 전통 시장에서 흥정과 협상의 기술이 무엇인지 깨닫다

정찰제의 세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 것



-모로코의 페스에 가다
-정찰제에 대한 가벼운 고찰
-상술, 협상의 기술, 심리싸움에 대하여





열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천년의 고도 페스에 도착했다. ©leewoo, 2017




모로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페스에 도착했다. 페스는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년의 고도(古都)였다. 789년 이드리스 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래, 1927년 라바트로 천도하기 전까지 모로코 역사 속에서 수도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유서 깊은 도시라 그런지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페스는 마치 저 먼 옛날에 이미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모든 건물이 흙과 나무로 쌓아 올려졌고, 도시 전체가 정교한 미로처럼 구획되어 있었다. 행인 사이로 짐 실은 당나귀들이 지나다녔다.



페스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까닭일까, 이곳의 주 산업은 상업이었다. 구 시가지인 메디나는 관광객들을 위한 커다란 상업지구였다. 메디나에서 상점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로코의 특산품, 수공예품, 장신구 그리고 페스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가죽 공예품들. 모든 것이 이방인의 이목을 끌었다. 상점을 돌아다니며 특기할 만한 점을 발견했다. 상품들에는 하나같이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물건이 있으면 상인들에게 값을 물어봐야 했다. “얼마에요?” 그제서야 상인은 물건의 값을 알려주었다.



어느 골목길에서 마주친 당나귀 ©leewoo, 2017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모로코의 메디나의 어느 골목 ©leewoo, 2017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인이 제시하는 금액이 제대로 된 금액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어째서인지 바가지를 씌우는 것만 같다. 시세를 모르니 일단 깎고 봐야 한다. 한데 어디까지 깎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협상을 해야만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인간이라는 것을. 그동안 일상에서 물관과 용역의 값을 치룰 때 '협상'을 한 적이 없었다. 선택하고 계산한다. 서비스를 받고 계산한다. 밥을 먹고, 커피를 먹고, 강의를 듣고 결코 흥정을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흥정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었던 것이다. 사실 배울 기회는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갔을 때가 그러했다. 어머니는 채소를 사고, 어류와 육류를 살 때면 상인들과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에이, 더 깎아줘." "이것 좀 더 줘. 자주 오는데." 어머니가 능청스레 말하면 상인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이고, 이거 팔면 남는 것도 없어." "값이 올라서 그래. 요새 경기 알면서 그래." 그러면 신기하게도 값은 처음 금액보다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어린 마음에 그런 행위가 창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막연하게 흥정을 하는 어머니가 창피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물건의 값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 구멍가게에 가봐도 모든 것의 값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국가도 모든 것의 값을 정해놓도록 법을 만들지 않았던가. 세상은 ‘정찰제’의 세계였다. 모든 상품과 용역에는 가격표가 ‘이미’ 붙어있고, 우리는 그것을 원하면 제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흥정을 하곤 하지만,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 누구도 애플스토어에서, 백화점에서 협상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 페스에는 정찰제의 세계가 아니었다. 도대체가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어머니로부터 협상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던 나는 된통 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이제 가격표가 없으니 간식거리를 사고, 밥을 먹으려면, 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상인들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잠시 생각한 후 값을 말하는 상인들의 눈빛을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다. 이 가격은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이제 흥정이 필요한 차례였다. 하지만 정찰제에 익숙한 이방인은 서툰 협상가가 되고 마는 것이다.




페스인들의 DNA에는 분명 상인의 기술이 유전되고 있을 것이다. ©leewoo, 2017




페스인들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의 산물을 중개하던 상인들이다. 패션을 선도하는 유럽의 유명 브랜드들의 가죽제품들 대다수의 원산지가 바로 페스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상대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들의 DNA에는 상인의 기질과 기술이 유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고객을 상대하며 의중을 파악할 줄 안다. 차를 대접하고 좋은 이야기와 칭찬을 하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안다. 흥정할 때 포커 페이스도 유지할 줄 안다. 그리고 결코 손해 볼 장사는 하지 않는다.



벌써 수 천 년 동안 이어지고, 수백 년 동안 전수되고, 수 십 년 동안의 노하우로 축적된 상술을 과연 정찰제에 익숙한 이방인이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어쩌면 정찰제는 우리에게 ‘협상의 기술’이라는 능력을 퇴화시켜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협상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 분위기를 압도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상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세상만사에 관계되어 있는 일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능력인 것이다.



가죽 공방에서 원하는 가방을 발견했다. 무조건 사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상술에 있어서 결코 유려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찰제의 안락함 속에서 협상의 기술을 잊은 것이다. 그래도 무작정 깎아 달라고 협상을 시도한다. 다짜고짜 제시하는 금액을 상인이 기분 좋게 받아줄 리가 없다. 협상은 팽팽한 줄다리기이며, 심리 싸움이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페스의 여정을 동행했던 여인은 달랐다. 협상에 있어 유려했다. 미소와 말재간으로 되려 상인의 혼을 쏙 빼놓았고,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필기할 것. 흥정과 협상은 기술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유려함도 한 몫하는 것이다. 그녀는 상인의 피를 타고난 페스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덕분에 나는 원하던 가죽 가방을 괜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가방을 사고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가죽 가방을 구입하며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역량이 부족하고, 또 타인에 비해 어떤 유려함이 부족한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다짐했다. 빈 가죽 가방에 상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녀가 보여주었던 유려함들을 담아 가겠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까지 페스에서 구입한 가방을 갖고 다닌다. ©leewoo,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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