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가노트 / 첫 북토크 후기
어느 가을날, 서초동의 한 스튜디오에서였다. 마당을 바라보는 넓은 창을 통해 싱그러운 햇살이 사다리꼴의 따스한 조각을 만들어냈고, 살짝 열어놓은 창 사이로 커튼이 나부꼈다. 물씬 풍기는 가을의 정취 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스튜디오 가득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나의 첫 북토크에 발걸음을 해줄 미지의 얼굴들을 말이다.
큰 결심을 하듯 북토크를 기획했다. 사실 일 년 전, 한 서점에서 북토크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분명 좋은 기회였음에도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흔히 강연을 하는 유명 인사들처럼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 년 후, 생각이 바뀌었다. 비록 엄청난 지식과 지혜는 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세상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쓴 글과 책을 읽어주는 소수의 독자들처럼, 내게 귀 기울여 줄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북토크를 결심했다.
하나 둘, 반갑고 낯선 얼굴들이 도착했다. 조촐한 북토크를 막연하게 상상했었는데, 무려 스무 명이나 와주었다. 오신 분 중에는 저 멀리 전라도에서 기차를 타고 오신 분도 계셨다. 그들이 나를 보고 둘러앉았다. 그들의 귀한 발걸음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준비한 토크 주제는 '이상향에 대한 갈망과 방황하는 인간에 대하여'였다. 거창하지만 결국 나의 이야기였다. 이번 신간의 소재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험과 여행을 동경했던 나의 지난 인생을 반추하여 삶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싱그러운 햇살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니,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저는 늘 그런 기분이 들어요. 세상과 저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있는 것이죠. 그 장벽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 두 권의 책이에요." 나는 청중을 향해 나의 두 권의 책, 레지스탕스와 자기만의 모험을 보이며 말했다. "저는 그동안 사람들과 교류를 잘 갖지 않았어요. 사람과 사랑보다 문학이 더 귀중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울 수 있다고 확신했던 거죠.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고, 저 또한 책을 집필해냈어요.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이 장벽이 되고 말았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책에 모두 적혀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도 저는 늘 듣기만 했어요. 할 말이 없었거든요."
"이번 북토크를 결심하게 된 건 이 장벽을 허물어보고 싶어서였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꿈은 훌륭한 문학가가 되는 건데, 과연 장벽을 앞에 두고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라는 게 본래 사람에 대한 탐구이자 이해를 하려는 시도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과 대화도 관계도 갖지 않고, 온전한 공감과 이해도 하지 않고 오직 활자를 통해서만 그것들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채, 그것들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장벽 뒤에서 장벽만 쌓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문학가가 될 수 없을 테니까요. 시대와 호흡하는 문학가가 되어보려 해요. 아무래도 오늘, 여러분과의 만남이 세상을 향한 저의 첫 걸음마가 될 것 같아요."
내밀한 이야기를 고백하고 나니 정말 장벽이 허물어진 것만 같았다. 청중들의 눈빛, 호흡, 태도, 온기 모든 것이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질문도 많이 받았고 즉흥적으로 대답도 했다. 글쓰기와는 달리 온전하게 내가 살아있으며 시대와 호흡하고 있음을 느꼈다. 몇 번이고 숙고하고 고쳐쓸 수 있는 글쓰기와는 달리 대화는 무척이나 즉흥적인 것이니 말이다. 미소도 취할 만큼 주고받았다. 이윽고 북토크가 끝나고 청중들이 스튜디오를 떠나갔지만, 그들의 온기는 여전히 잔상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아기의 걸음마를 도와주는 보조기처럼 나를 지탱해주었다.
북토크 이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예전처럼 주야장천 책에 머리를 박고 있지 않다. 사람과 사랑을 먼저 생각한다. 지인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함께 커피잔과 술잔을 기울이며 일상적이고 때로는 시시콜콜하고 때로는 내밀한 생각들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시대의 조류를 느껴보려 노력한다. 유행하는 노래와 드라마를 챙겨보고, 주목받은 전시회에 기웃거리며 시대 정서에 주파수를 맞춰본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온다. 책과 지면으로 말이다.
무너뜨린 장벽 덕분에 예전보다 적게 읽고, 적게 쓰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확신이 든다. 지금 나는 이 시대에 살고 있고, 나의 창작물도 이 시대의 호흡을 담고 있다고. 그렇다면 과연 나의 걸음마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더 이상 장벽을 그늘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날의 북토크에 따스했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북토크 라이브 영상 : https://youtu.be/v0v9mwV77W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