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시간과 언젠가 다가올 시간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첫 번째가 크로노스Krónos이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우스를 비롯한 여섯 올림푸스 주신主神들의 아버지이다. 크로노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인들은 태초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허한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시간'이 가장 먼저 생겨났다고 본 것이다. 이는 꽤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였다. 철학에서도, 양자물리학에서도 모든 존재와 사건은 '공간'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해야 한다. 카이로스가 등장하며 그리스의 우주론이 그 첫 페이지를 열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모두 관념의 신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념들이 신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신들의 신격화를 제거하면, 이들은 모두 순수한 관념으로 전락한다. 앞서 이야기한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신격화가 된 것이다. 크로노스에서 신격화를 제거하면 '시간'의 사전적 정의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크로노스가 말하는 시간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 바로 지금도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물리적 시간을 뜻한다. 오늘날에도 시계의 계기판을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라고 부른다. 옛 신은 그저 관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가 남긴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시간'도 남겼다. 그 시간은 바로 카이로스Kairos이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시간이다. 콕 집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시간도 아니고,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도 아니다. 언젠가 도래할 순간, 하염없이 기다리는 순간을 의미한다. 도대체 카이로스는 어떤 신이었길래 이런 의미를 남긴 것일까. 그는 기회의 신이었다. 기회는 물리적인 시간속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동양에서도 기회는 무언가를 하기에 적당한 시기를 뜻한다. 크로노스가 가리키는 정확한 시간은 '때'인 것이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물론 크로노스처럼 일상 속에서 널리 쓰이고 있지는 않다. 카이로스가 가장 많이 녹아있는 곳은 기독교이다. 기원전 1세기-2세기 즈음에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그리스어가 식자층의 언어이자 유럽-소아시아 문명권의 공용어였다. 그래서 성경도 그리스어로 쓰였다. 참고로 예수의 복음을 유럽에 전하고 훗날 그리스 정교회의 토대를 쌓은 사도 바울도 그리스인이었고 자신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고린도서를 집필을 했다. 성경에도 카이로스가 등장한다. 카이로스는 예수 재림과 천국의 도래를 가리키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가리킬 때 쓰이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적 시간 관념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게 살아남아 있다. 여전히 우리는 크로노스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크로노그래프’를 바라보며 시간을 체크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영역 그 자체가 크로노스이다.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는 알람도, 통학 시간과 출근 시간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퇴근을 가리키는 시계바늘도, 저녁 약속도,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도, 운동 경기 관람도, 주말 약속도 모두 정확한 시간 아래 진행된다. 기다리는 휴가도, 공휴일도 모두 정확한 시간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세분화된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며 크로노스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어떤 의미로 우리 삶에 녹아들어 있을까. 카이로스는 기독교에 침투한 카이로스처럼 어떤 맹목적인 희망과 결부되어 있다. 대학에 합격하는 날, 학위를 취득하는 날, 시험에 합격하는 날, 주택청약에 당첨되는 날, 본가에서 독립하는 날, 대출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날, 부자가 되는 날, 고난 없이 행복해지는 날, 그녀의 사랑을 얻게 되는 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날. 구체적이지 않은 시간들이 저 미래의 어느 순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게 바로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매혹적으로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날을 위해 달려가라고.
나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 크로노스보다 카이로스라고 생각한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맞추고 따라가는 시간이지만, 카이로스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숭배하고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역사적으로도 인간이 카이로스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명이 되었다. 지난날 사회주의자들은 인류의 정치적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일념 아래 수천만 명이 죽어가는 걸 그저 지켜만 봤다. 독일 나치는 아리안족의 부흥을 위해 유대인 학살을 국가적으로 용납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젊음과 목숨을 내걸었다. 인간은 크로노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와 꿈, 그리고 희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밤을 새울 수도, 당장의 행복을 포기할 수도, 오늘의 고통을 감내할 수도 있다. 크로노스를 알려주는 우리의 시계, 크로노그래프처럼 카이로스를 알려주는 카이로그래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우리 각각의 존재가 카이로그래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 순간이 올 거라 굳게 믿고있고,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그때가 오면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도 우리일테니 말이다. 시간속에서 때를 기다리자. 크로노스속에서 카이로스를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