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하게 포장되는 치부되는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재정의
에로스(Eros)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사의 날개를 달고 사랑의 화살을 쏘고 다니는, 아기 혹은 미소년으로 그려지는 그리스 신화 속 ‘사랑의 신’이다. 우리에겐 라틴식 명칭인 큐피드(Cupido)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화살이면 인간들은 물론 신들까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에 관한 모든 것들은 모두 에로스가 관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으로서의 에로스를 탐구한 것이었다. 에로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탄생했는지 탐구함으로써 사랑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플라톤의 저서 <향연>은 바로 이것에 대한 탐구, 즉 에로스에 대한 담론이 담겨있다. 사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란 관념들이 신격화된 것이었기에, 그들의 탐구 방식은 꽤나 논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격화된 관념을 탐구함으로써 본 관념의 근원적인 본질로 다가가고자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향연>속에서 드러나는 에로스의 근원과 그 본질은 무엇일까. 파르메니데스는 에로스는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맨 처음으로 만들어진 신이라고 했다. 헤시오도스는 카오스(혼돈) 속에서 가장 먼저 에로스가 생겨났다고 했다. 즉 이들의 견해는 에로스가 올림푸스 신들 이전의 보다 높은, 태초부터 있어 온 신이라는 것이었다. 파이드로스는 이들의 견해를 빌려 에로스야말로 현존하는 신들 중 가장 고귀하며, 그의 존재 자체인 사랑이야말로 인간에게 덕과 행복을 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견해를 주장한다. 그는 에로스는 풍요의 신 포로스와 빈곤의 신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나 그들의 성격을 이중적으로 갖게 된 신이라고 했다. 때문에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페니아처럼 빈곤하지만, 포로스처럼 풍요로워지길 원한다는 것이다. 초라하지만 아름다워지길 원하는 것, 나아가 선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에로스, 즉 사랑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저자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데아’론을 합리화하려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여기 다른 견해도 있다. 파우사니우스는 에로스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와의 관계에 주목했다. 에로스는 앞선 견해들과는 달리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어머니를 먼저 아는 것이 순서라고 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프로디테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흔히 아프로디테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속설이 있다. 그 첫 번째는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탄생>에서 그린 것처럼, 우라노스의 정액이 바다 위에 뿌려져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파우사니우스는 전자를 ‘하늘의 아프로디테’로, 후자를 ‘세속의 아프로디테’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두 아프로디테를 모두 긍정하며, 그녀의 아들인 에로스 역시 각기 다른 두 개의 존재가 있다고 보았다. 에로스도 ‘하늘의 에로스’와 ‘세속의 에로스’가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는 전자의 에로스는 남성적 혈통을 가진 ‘고귀한 사랑’이며, 후자를 육체적 욕구를 목적으로 하는 ‘저열한 사랑’으로 보았다.
흥미롭게도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갖는 에로스의 본질은 파이드로스의 견해도, 소크라테스의 견해도 아닌, 파우사니아스의 견해이다. 이원론적으로 바라보는 사랑. 그것은 우리가 이원론적 사고를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과 여, 선과 악, 낮과 밤, 흑과 백, 육체와 영혼처럼. 파우사니아스의 견해는 우리의 이원론적 취향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사랑을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단지 그 명칭만이 바뀌어서. 플라토닉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토닉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고, 에로스적 사랑은 육체적 사랑을 뜻하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관념 그 자체로 쓰이던 에로스가, ‘육체적’ 혹은 ‘관능적’인 의미로 대치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가치 전도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 세계가 기독교로 대체되는 변혁을 경험했다.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통칭 사랑으로서의 에로스보다 고귀한 사랑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가페적 사랑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자신마저 희생하는 무조건적인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적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이다. 사랑을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으로 바라보던 통상적인 이원론적 관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보다 고귀하다고 여겨지던 정신적 사랑도 아가페적 사랑 앞에서 저열한 사랑이 되고 만 것이다. 바로 이때 ‘에로스’에서 분화되었던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다시 에로스 그 자체로 회귀하면서 ‘저열한 사랑’ 그 자체로 밀려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에서 사랑의 이원론적 관점은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의미나 해석을 함의하지 않게 되었다. 저 먼 과거처럼 그 누구도 사랑 그 자체를 에로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에로스와 연관되는 것은 그저 에로틱(Erotic) 한 것이다. 사전적 정의로 에로틱하다는 형용사는 성적인 욕망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로 정의하고 있다. 프로이트 역시 에로스를 성욕동과 자기보존의 욕동의 개념을 포괄하는 성적인 의미로만 한정시켜 사용했다. 에로스는 이제 오직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으로 한정되고 만 것이다.
육체적인 사랑, 에로스. 이 뜨거운 사랑은 사랑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언제나 저열한 사랑으로 취급 당해왔다. 플라토닉 사랑에 비해 고귀하지 못해서, 아가페적 사랑에 비해 선(善)하지 못해 말이다. 쉽게 말해 에로스에는 추악함과 악(惡)이라는 저열한 굴레가 씌여져있는 것이다. 때문에 에로스적인 것에는 국가가 발 벗고 나서 검열을 가한다. 그 허용범위도 국가가 재단한다.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 에로스적인 것은 오직 성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에로스적인 것은 유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에로스적 사랑에 상반되는 플라토닉 사랑 혹은 아가페적 사랑에 국가적, 혹은 사회적 제재는 전무하다.
일례로 매년 노벨 문학상에 거론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적나라한 성적 묘사로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저급하다고, 야설과 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들은 그럼 섹스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의 말속에는 에로스적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추악한 것도, 악의 개념도 아니라는 관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에로스적인 것에 있어서는 조심스러울 뿐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왜 그저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왜 아름다움이 부재하고 있는 것일까. 심오하게 따져보자면, <실낙원>의 저자 밀턴의 관점(청교도적 관점)처럼 에로스적인 것에는 ‘원죄’의식이 결부되어 있다. 그 자체가 죄악인 것이다. 성경에서도 에로스적인 것을 절대 사랑으로서, 혹은 단순한 유희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음란한 것, 문란한 것, 나아가 죄악의 개념으로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에로스적인 사랑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악에, 비도덕에 가까워지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가 에로스를 아름답게는 바라볼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시 ‘향연’의 세계로 돌아가 에로스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에로스를 다시 새로이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새로이 에로스의 근원을 탐구하고, 그 본성을 다시금 파악해보는 수밖에 없다. 다시 원점이다. 에로스는 누구이던가. 사랑의 전령, 사랑의 신이다. 그렇다면 ‘에로스적 사랑’의 관점을 새로이 바라볼 차례이다. 신으로서의 ‘에로스’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신 에로스도 사랑을 했다.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세계를 시적으로 그려낸 밀턴도, 그리스 신화를 새로이 집대성한 벌핀치도 이 에로스의 사랑을 그려냈다. 시인과 작가뿐만이 아니다. 그 유명한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와 프랑수아 피코도 에로스의 사랑을 캔버스 속에 그려냈다. 에로스가 사랑한 여인은 프쉬케이다. 대개 그리스 신화 속 사랑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아폴론과 다프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르키소스 역시 비극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은 여타 그리스 신화 속 사랑 이야기와는 판이하다.
프쉬케는 아름다운 인간으로서, 그 미모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비견되곤 했다. 아프로디테가 자신과 비견되는 한낮 인간을 달갑게 여길리 없었다. 그녀는 아들을 시켜 프쉬케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고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화살을 쏘고 오라고 했다.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프쉬케에게 사랑의 장난을 치기 위해 갔다. 화살을 쏘려는 찰나, 에로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프쉬케가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에로스는 그만 형편없는 사내에게 쏠 화살에 자신이 상처를 입고 만다. 에로스는 프쉬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에로스의 화살은 절대적이다. 세간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녀는 이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사랑은 오직 에로스와만 할 수 있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딸이 찬밥 신세가 된 것을 본 그녀의 부모는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딸이 시집을 못 갈까 봐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딸에게 도대체 짝이 있긴 한 건지 묻는다. 돌아온 신의 응답은 그녀는 산꼭대기에 사는 괴물 같은 신랑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화살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은 아폴론의 신탁이다. 프쉬케는 신탁을 따라 산꼭대기로 향했고, 호사스럽지만 주인이 없는 궁전을 맞이하게 된다. 시종들은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준다. 이윽고 결혼식이 치러졌다. 에로스가 나타난 건 의아하게도 어둠 속이었다.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말이다. 프쉬케는 어둠 속에서 만난 에로스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결혼생활을 했다. 에로스는 동이 트면, 그녀가 눈을 뜨기도 전에 그녀 곁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프쉬케는 에로스에게 얼굴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안된다는 말뿐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궁금해하지 말고, 그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프쉬케는 에로스를 사랑했다. 조금은 무료한 결혼생활을 해나가던 프쉬케는 궁전으로 언니들을 초대한다. 동생의 호사스러운 결혼생활을 질투한 언니들은 그녀를 부추기기 시작한다. 남편이 정말 추악한 괴물일지도 모르니 몰래 확인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프쉬케는 호기심과 두려움에 몰래 등잔을 비춰 자신의 남편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추악한 괴물이 아닌 아름다운 사랑의 신 에로스였다. 놀란 에로스는 약속을 어긴 그녀에게 화가 나 그녀를 떠나버린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에로스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프쉬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남편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인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남편을 만날 방도를 물었다. 아프로디테는 고깝지 않은 며느리에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시키고, 저승까지 가서 죽음의 신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를 만나라고 한다. 에로스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프쉬케는 아프로디테의 명을 따라 이 모든 것을 해낸다.
프쉬케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여신들의 아름다움이 담긴 상자를 아프로디테에게 운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호기심이 문제인 것이다. 이번에도 프쉬케는 상자에 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궁금해 열어보게 된다. 허나 상자에는 아름다움이 아닌 저승 세계의 영원한 망각의 잠, 죽음과도 같은 스튁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프쉬케는 스튁스를 대면하곤 그 자리에서 깊은 죽음의 잠에 빠져들게 된다.
에로스는 자신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며 저승에 가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 프쉬케를 가엽게 여겼다. 에로스는 올림푸스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단숨에 날아가 프쉬케를 어여삐 여겨 살려줄 것을 탄원했다. 제우스는 프쉬케의 사랑에 감복해 아프로디테에게 그녀를 용서해줄 것을 설득했다.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의 말에 따라 그녀를 용서해주었다. 제우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순애보를 높이 사 그녀를 올림푸스, 신들의 곁으로 끌어올려 준다. 그리고 모든 신들을 초대하고 에로스와 프쉬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한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준다.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 장난으로 우연히 맺어져, 믿음으로 이어지고, 죽음까지 불사하게 된 사랑. 에로스와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된 프쉬케의 이름 또한 의미심장하다. 프쉬케(Psyche)는 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정신병(Psycho)과 정신학(Psychology)의 어원이 되었다. 에로스적 사랑은 이처럼 전혀 에로틱하지 않고, 오히려 플라토닉 사랑처럼 ‘정신 Psyche’적인 사랑이다. 이제 우리는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셈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더 이상 저열한, 반쪽짜리의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것이다. 에로스적 사랑에 에로스적 사랑을 더하자. 저 파우사니우스가 이원론적으로 바라보기 이전처럼 말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이제 온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