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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16. 2023

일리야 밀스타인의 어스름한 새벽

[전시]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Review

뉴욕타임스와 구글, 페이스북, 구찌, 그리고 우리나라의 LG가 사랑한 작가 일리야 밀스타인.


일리야 밀스타인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멜버른에서 자랐다. 현재는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래서 소중한 부분들을 숨은그림찾기처럼 담아내며 탄성과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캐비닛' 속에 첫발을 들인 순간 웃음보다는 탄성이 앞섰다.



 

일렁이는 햇빛을 담아내는 일러스트레이터


Estate, 여름, 2022 ⓒ Ilya Milstein

보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커다란 일러스트 앞에 서자 그런 착각이 들었다. 신기한 점은, 집에서 모니터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현재에도 비슷한 감상이 든다는 것이다.


장소를 불문하고 보는 이를 시원한 그늘로 데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그림이었다. 이것은 햇빛을 찬란하게 그려낼 줄 아는 작가의 재능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밝은 색채의 그림들에 햇빛이 여유롭게 스며들어 있었다.


일리야 밀스타인은 느지막한 오후의 햇빛을 사랑할 줄 아는 작가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어스름한 새벽


Lovers, 연인, 2019 ⓒ Ilya Milstein

하지만 태양이 하루를 덥히고 나면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Lovers'의 앞에 선 순간, 일리야 밀스타인의 낮을 찬양하던 사실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의 밤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치 꿈을 꾸듯 부유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야간은 적막하고 암울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고요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쉼'의 시간이었다.  


A Library by the Tyrrhenian Sea, 티레니아해 옆 서재, 2018 ⓒ Ilya Milstein

화룡점정은 그의 새벽이었다. 동이 터오는 시간, 일리야 밀스타인은 티레니아해가 보이는 서재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절로 그런 호기심이 생겨나게 만드는 그림이었다.


작가의 기억을 선과 색으로 전달받으며 순간적으로 사색에 잠겼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내면이 잠잠해지는데, 티레니아해 옆 서재에 앉아 해당 공간을 향유했을 일리야 밀스타인은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렇게 완벽한 서재를 가진 일리야 밀스타인을 부러워하며 그가 그려낸 어스름한 새벽에 감탄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새벽의 순간을 완벽하게 담아낸 그림이었다.  




"한국에서 받을 영감과 도시의 느낌, 관람객들과의 교감이 기대된다."



"오래전부터 한국 문화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한국에서 받을 영감과 도시의 느낌, 관람객들과의 교감이 기대되어 첫 한국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


일리야 밀스타인은 이번 국내 첫 대규모 전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며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 한국과 관련된 그림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LG에서 커미션을 받은 작품들이 다수 있었는데, '늦오후의 휴식', '쉬고 마시고 사랑하라',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이 그렇다.


A Fresh Start to a Fresh Day,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 2022 ⓒ Ilya Milstein

특히 '아이들과 함께하는 활기찬 아침'을 주제로 제작된 LG전자의 2022년 커미션 작품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에서는 한국의 문화들을 엿볼 수 있다.


직접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찾아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이지만, 힌트를 주자면 다음과 같다. 냉장고 속에는 복분자주나 소주, 박카스 등이 진열되어 있다. 선반 위에는 원앙 목조각과 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가 있다. 반가운 한국의 문화 요소가 곳곳이 숨겨져 있는 모습이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현실을 표현한 작품



귀여운 디테일이 섞인 LG전자의 커미션 그림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한국과 관련된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지의 땅」이었다.


「미지의 땅」은 디스토피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보트 시리즈 Boats Series 중의 하나다. 싱어송라이터 '보트'의 데모곡 중 하나인 「North Korean Border」(직역: 북한 국경)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북한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요소는 없지만 검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나뉜 두 땅은 분단과 단절을 내포하고 있다. 물 위의 사람들은 강물에 줄지어 떠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무심하다.


「Lovers」가 일리야 밀스타인의 밤이었다면, 「미지의 땅」은 한국의 밤이 아닐까 싶다. 옆에서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데 무심하게 할 일을 하는 이들을 표현한 그림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분단 현실을 그려낸 「미지의 땅」은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직접 확인해 보자.


 ***


일리야 밀스타인은 이처럼 낮의 뒷면을 덤덤하게 그려낼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전시는 마치 우리의 하루와도 같다.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을 즐기다가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사색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일리야 밀스타인만의 어스름한 새벽이 있다. 낮과 밤을 조화롭게 연결하고 있는 새벽을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일리야 밀스타인전을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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