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엔 스페인이지

다녀오겠습니다.

by 이연

- 선생님, 저는 4월엔 수영 학원을 다니지 않아요. 여행을 가거든요.

- 안녕하세요, 책방에 4월부터는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오래 어딜 좀 가요.

- 4월에 나 여기 없는데 그전에 보자.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는 근황. 나는 화요일에 스페인으로 3주간 여행을 떠난다. 보통 퇴사 직후가 가장 시간과 돈이 많다고 하지. 회사 친구들은 되도록 먼 나라, 그리고 가고 싶은 나라로 여행하라고 했다. 아직 동남아를 못 가본 나는 한 달 동안 태국을 갈까, 했으나- 이번엔 어쩐지 스페인이었다. 정말 다른 곳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공식을 하나 만들었다. '퇴사 후엔 스페인이지' 유독 추운 겨울을 보낸 난, 따뜻한 지중해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 매거진을 만들었습니다.

노트북을 두고 올 것이라 여행 내내 핸드폰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것이 좀 걸리지만, 무드 있는 미니멀리스트의 자세라 생각하고 감내하려 한다.(오타가 나도 이해해주셔야 해요.) 혼자 떠나는 장기 여행이 간만이라 설렌다. 23살 때의 유럽여행 이후로 처음이구나. 그래서 이번엔 카페에서 멍도 때리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려 한다. 사진도 원 없이 찍을 테야. 책은 이북리더기와 문학동네 100 기념 티저 시집만 들고 간다. 퇴사한 한량의 자유로운 스페인 여행기를 지켜봐 주세요. 참고로 본인의 여행 스타일을 알려드리며, 몇 가지 공약을 합니다.





준비물이 철저하다(준비성 아님)

공약 1.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물건이 어떻게 유용하게 쓰였는지 잘 기록해보겠습니다.


뭐랄까. 인간 자체가 태생적으로 물건에 어떤 집착이 강하달까. 잘 소분된 샴푸, 린스와 휴대용 전자기기, 편리한 멀티탭 등에 여행 내내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보통 준비물을 전부 챙기기 직전 2주일 정도 구상 및 구매의 시간을 가진다. 이번 여행에서 크게 신경 쓴 것은 3가지 품목이다.

수영 학원에서도 요긴하게 쓰고 있는 소분된 액체들
여행용 미니 헤어드라이기와 고데기
실물을 봤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분홍색의 경량우산


옷은 많지 않게, 최대한 편한 옷 위주로 챙기려 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이 꼭 들어가 있는, 아주 유치한 착장으로. 여행 중 유치하게 입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여러 번 유럽을 다녀왔는데 딱히 한식 생각은 나지 않았으니, 이번엔 가져가지 않을 거다. 설마.. 설마... 이렇게 다짐해놓고 가서 막 촌스럽게.. 설마...









러프한 계획

공약 2. 제 루트가 추천할 만한 루트인지, 어떤 장단점이 있었는지 기록하겠습니다.


물론 러프의 기준이 상대적이지만 내 기준 교통과 루트, 숙소를 정하면 100% 계획을 완성했다고 판단한다. 세부 계획은 짜지 않는다. 부모님을 모시고 갈 때 가이드를 하기 위해 디테일한 계획을 짠 적이 있었지만 내겐 잘 맞지 않았다. 욕심만큼 되지도 않았고, 어쩐지 검색할 때 너무 많이 본 것을 실제로 보면 감흥이 덜하달까. 부족한 정보력과 민첩성으로 할인이나 중요한 예약 등을 놓치기도 하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다 해결이 되더라. 그럼에도 아직 완전 러프한 여행(항공권만 끊어놓고 머물며 다음 루트를 정하는 스타일)을 하기엔 아직 겁이 많이 난다. 다음 여행은 그런 스타일로 해보고 싶다. 마음에 드는 도시에 원하는 만큼 머무는. 아무튼 저의 루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많이 걸어 다닌다

공약 3. 스페인에서 걷기 좋은 곳, 추천드립니다.


3킬로 이내는 다 걸어서 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잘 후회한다. 스스로를 귀엽고 웃기다고 생각하는 포인트. 이번 여행도 너무 많이 걸어서 녹초가 되겠지. 그렇게 많이 걷는 때엔 소화가 잘 된달까, 만성 위염도 여행 땐 씻은 듯 사라진다.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장점은 자신을 원하는 만큼 혹사시킬 수 있다는 것. 친구가 있다면 왜인지 조심스럽잖아. 물론 내 친구들은 나 못지않게 튼튼한 다리를 가진 혹사형 뚜벅이들이지만. 지치도록 걷는 일도 여행의 묘미라 생각한다. 이번도 그럴 생각이고. 멋진 산책을 기대한다.


손잡고 걸으세요 / 하이델베르크 걷는 길










간혹 그림을 그린다

공약 4. 간혹 그린 그림 컬렉션을 선보이겠습니다.


간혹이라는 수식이 꼭 붙어야 한다. 친구들은 "좋겠다, 너는 여행 다니면서 막 그림도 그리고 그럴 거 아냐."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난 여행 다니면서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뜸하게 그린 드로잉, 사실 그건 전공자로서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린 것임을.. 말한다면 친구들의 로망이 파괴되려나. 그래도 이번엔 길거리에서 가만히 앉아 크로키도 하고, 수채화도 하고. 남 보기에 멋진 짓은 다 해보려고 한다. 예전에 독일 가는 기차에서 어떤 여자아이를 그렸고 그 소녀에게 그림을 선물한 기억이 좋게 남았다. 이번에도 서로에게 행운이 되는 추억 하나가 생겼으면 한다.


수채화로 그렸다 / 프랑크푸르트









사진을 많이 찍는다

공약 5. 스페인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멋진 사진을 올려보겠습니다.


그림은 간혹 그리지만 사진은 많이 남긴다. 자주 찍고 싶기 때문에 무거운 카메라는 쓰지 않고, 가격이 DSLR을 뺨치는 하이브리드 똑딱이를 들고 다닌다. 이번에도 멋진 사진을 많이 찍겠습니다. 늘 아쉬웠던 것은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놓고 귀찮음으로 어디든 올리지 못해 하드에 썩혀두는 일이었다. 이번 여행 땐 브런치에 매거진을 연재하며 최대한 사진을 생생한 글과 함께 나눌 생각이다.

유럽은 어떻게 찍어도 화보니까 / 그린델발트









쓸데없는 물건을 많이 산다

공약 6. 많이 사겠습니다, 그리고 자랑 및 추천도 열심히 할게요.


써놓고도 설레는 문장이다. 나는 물건이 참 좋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엔 글러먹었다. 외국에서 발견하는 신기한 물건들은 나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번엔 나의 취향으로 어떤 요상한 물건을 사는지 함께 또 꼼꼼히 기록하겠다. 참고로 아래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목록.

차, 와인, 문구류, 에코백, 로컬 화장품, 도자기, 초콜릿

유럽에서 맛이 좋은 것 : 초콜릿과 빵








돌아오면 바쁜 5월과 따뜻한 날씨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대비해 입지 못할 간절기 옷을 열심히 입어두는 요즘이다. 벚꽃을 못 보는 것이 아쉽지만 4월이라는 멋진 달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즐겁다. 누군가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하신다면 연락을 주셔도 좋아요. 아무튼 저,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연의 스페인 매거진을 즐겁게 지켜봐 주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