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은 출발
옷은 조금만 챙기려고, 스페인은 자라가 싸다잖아. 계절도 마침 따뜻하고 좋아. 아, 그리고 작은 헤어드라이기와 고데기를 샀는데 정말 귀엽고 작다? 세면도구는 수영 학원 다니면서 쓰던 거 그대로 가져가려고. 잘 소분되어있어, 삼주면 충분할 것 같아. 나머지는 뭐, 별거 없네.
=13.4kg
1.
진땀이 흘렀다. 오래 차근차근 준비한 여행이라 준비물도 빠짐없이 완벽했는데... 완벽의 무게를 간과했다. 게다가 예상 못한 천재지변으로 결항되었다는 이메일은 또 무엇인가.(4월에 폭설이라니) 뭐, 공항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이불에 누워 글을 적는다. 지금부터 여행은 시작된 거야. 가벼운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꾸렸다. 가서 먹어치울 짐이란 멀미약뿐이라 대체 어떤 게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름의 최소한도라 생각한다. 아래는 맥시멀 리스트의 미니멈.
2.
지금은 공항리무진을 기다리는 정류장에 앉아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자는 동안에도 비행기를 놓치는 악몽을 계속 꿨다. 늦잠을 잤던 작년 7월 상해 여행을 떠올랐다. 혼자 이를 바득 갈며, 아냐 그때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아 제발 꺼져 하며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결코 늦을 리 없다. 대체 항공 시간이 미뤄졌거든. 잠들다 깬 두시 반쯤 확인한 메일엔 변경된 항공편이 적혀있었다. 인천-헬싱키-바르셀로나로 가는 핀에어였는데, 대한항공으로 네덜란드를 경유해 klm을 타고 바르셀로나로 도착하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아니 대한항공 주려면 직항을 주던가.라고 속으로 잠깐 화를 냈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너무 늦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근데 번뜩 머리를 스친 것은 나의 면세품이었다. 아.. 인천에 제2여객 터미널이 오픈했고 대한항공을 타면 이용할 수 있다는 기사를 얼핏 본 게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완전 다른 장소에 위치한 터미널이었다. 내 면세품은? 향수나 립스틱은 5월 여행 때 찾아가도 그만인데 목베개는 당장 필요한 것이다. 그건 내 준비물 리스트 중 가장 야심작이란 말이야. 새벽에 잠을 못 이루고 재구매 방법을 찾아봤다. 그러나 새벽에 변경된 대체항공이라 항공권 정보 반영이 안되어 구매가 불가했다.... 흑흑.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 주는 베개를 쓰자.
3.
여기까지 보니 내가 제법 여행 초반부터 불행한 사람처럼 보인다. 근데 속상하다던가 벌써 기운이 빠진다거나 하진 않다. 준비된 많은 것들 중 일부만 잘 되지 않은 것이다. 그 뒤엔 분명 내가 준비하지도 않은 멋진 일들과 행운이 즐비할 테니.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바뀐 비행기도, 못 받은 목베개도 아니다. 잠을 못 자서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그래도 그마저 비행기에서 잠이 잘 오겠네,라고 생각하고 말다니, 나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거니. 게다가 오늘 집을 나선 길은 정말 훌륭했다. 언제 필까 마음 졸이던 벚꽃이 만개해 길을 마중해줬다.
4.
바르셀로나 공항 도착시간은 이론상 10시 45분이다. 이것은 그저 허상이자 꿈임을 알고 있다. 짐을 찾은 후엔 금방 자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택시를 타고 12시 전까지 체크인하란다. 당신.. 막 자기 택시비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흑흑. 계산해보니 그 밤에 한국인 동행을 구해서 같이 택시를 나눠 타고, 각자 한 장소에 하차하고, 타지의 숙소를 찾아가고, 그 모든 게 시간제한 안에 해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 미래의 내가 불쌍해졌다. 피로하고 긴 4월 3일이 되겠구나. 쿨하게 카탈루냐 광장에서 가까운 16유로짜리 호스텔을 예약했다. 홀로 맘 편히 5유로짜리 공항버스를 타고, 광장에서 가까운 그곳에 닿아 쉬는 것은 충분히 위로가 될 것이다.
5.
제2여객터미널은 확실히 새 것 느낌이 난다. 셀프체크인 시스템도 편리하다. 바깥 날씨는 억울한 듯 흐려서, 살짝 걱정이다. 내 집, 잘 있어야 할 텐데. 어서 짐을 맡기고 탑승동에 들어가 밥을 한 끼 먹고 싶다. 비싼 거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여행 전에 배웅을 많이 받는다. 그것도 참 행운이야. 지금처럼 틈틈이 글을 쓰는 게 즐겁다. 여행지에서도 더 열심히 기록해야지. 공항에 왔어. 벌써 나는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