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 스페인, 안녕

by 이연

분명 늦잠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잠들었지,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자다 깼다. 한 세 시간 잤나. 더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온다. 지긋지긋한 수면장애.





6시에 일어나기로 하고, 알람을 4개나 맞춘 후 저주처럼 4시에 눈을 떴다. 마드리드 광장에서 길을 헤매는 악몽. 잠이 오지 않아 5시쯤엔 포기했다. 길을 나섰다. 처음 보는 한적한 솔 광장이었다.





맨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털보(라고 부르기로 했다)에게 인사도 못했는데. 내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스스로에게 다정하려고 노력하긴 한다. 오른손 조심해. 굳은살이 생겼잖아. 의자에 앉아. 조금이라도 앉아있어. 그래, 그래.





근래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으면 했다. 행복을 과시하다 보면 그 감정이 떨어지는 순간 거짓으로 지어내지 않을까, 혹은 타인이 자신과 비교해서 불행해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언제부터인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일이 뭔가를 소중히 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되어, 쓸데없는 말이 줄었다. 비밀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마음을 접어 삼켰다. 필요 없는 문장들로 횡설수설대는 이유는 내가 몹시 행복하고, 그걸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킬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 잘 없는 행복, 소중한 기억이 그중 하나다. 기침처럼 말한다. 행복하다고.





고집을 부린다. 유치해지고 싶지 않다. 언제나 선택한다. 아닌 건 아니다. 계속 아니다. 보여주려고 행복해지지 마. 온전히, 나를 위해 행복해야 해.





거기 놓고 온 게 있어? 아니 없어. 그럼 뒤돌아보지 마. 그냥 나머지는 두고와.





가방은 찰떡같이 23.1킬로였다. 라이언에어를 탈 때엔 20킬로였는데. 훌륭하다.





비행은 지루하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욱 그렇다. 도착하면 일단 머리를 자를 생각이다. 손톱도 깎고. 빨래도 돌려야겠다. 헬싱키에서 경유한다. 핀에어는 생각보다 훌륭하네. 짧은 노선 운영하는 항공기 중에서 가장 쾌적했다. 다만 아기들이 너무 많이 탔고.. 자주 운다.. 불가항력엔 불평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귀마개가 있으니까.





여긴 헬싱키 공항. 물가가 소름 끼친다. 물이 2.5유로씩 한다. 4.5유로짜리 히말라야 소금을 샀다. 집에서 고기 구워 먹어야지.





가히 감동적인 핀에어의 영화 라인업...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코코, 원더, 쓰리 빌보드, 셰이프 오브 워터, 덩케르크 등... 게다가 화면도 선명하고 정말 좋다. 타고 온 대한항공보다 훨씬, 훨씬 더 좋아. 007 스카이폴...? 눈물이 납니다.. 안 자고 영화 열심히 볼게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비포 선라이즈... 핀에어 진짜.... 사장님 정말...





기분이 이상하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늘 좋았는데. 지금은 왜 뭔가 억울해? 거짓말 같고.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좋았는데. 추로스라도 사 올걸. 아니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람? 털보에게 이름 물어볼걸. 이건 또 무슨. 미리 인사를 할걸. 바보. 바보 같은 후회만 계속한다.





여행이 끝나간다. 이이언의 노래, 세상이 끝나가려 해, 가 왜 자꾸 머리에 재생이 되는 건지. 거기나 여기서나 나는 늘 나인데. 나는, 언제나 나였지만 이번 여행 동안 더욱 내가 된 기분을 느꼈었다. 그걸 어떻게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오래, 잘 기억하고 싶다고.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첫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기에 이렇게 썼었다. '지난 여행을 그리워하지 말고 다음 여행을 생각하며 살아.' 모르겠다. 뭐가 맞는 말인지. 그래. 이만큼 더 멋진 다음 여행이 있을 거라, 믿어도 되겠지.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내버려둘 것이다. 다만 배운 것들을 기억해야지. 오래 걷기보다 오래 앉기, 천천히 먹기, 주변에 온통 낯선 것들을 두고 세상에 나 혼자인 듯.. 행복하게 살기.





Just remember. Our hearts and our bodies are given to us only once. Don't kill it.


영화를 연달아 세편 봤다. 다 봤던 영화들이네. 아.. 아침식사 냄새가 난다. 역겹다. 살면서 도착 예정시간보다 일찍 착륙하는 비행은 처음이다. 무려 30분 빠르다. 아아. 집이구나. 유럽 시차인 몸은 잠을 잘 시간인데 한국에 도착하면 삶을 시작할 8시다. 뭐든, 빨래를 돌려놓고 낮잠을 자야겠다. 그래. 진짜 좋은 여행이었어.





도착하면 한국어가 많아서 반가우면서 낯선 기분이 든다. 4월 27일이 되었다. 미세먼지가 없는 좋은 하루란다. 게다가 청소를 마치고 샤워 후 자고 일어나니, 종전선언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경사람. 살다 살다 탄핵도 보고 종전도 보는구나. 컨디션이 좋다. 도착하자마자 볼 친구가 있다니 여행에서의 서러움이 약간 치유되는 듯하다. 나 되게 웃기지? 올 땐 아쉬워서 울 것 같다면서 도착하니까 또 진짜 좋다. 쾌적하고, 편하고, 저렴하고.. 점심으로 쌀국수와 돈가스를 먹었는데 정말 행복했다. 오늘 머리는 못 잘랐지만 괜찮다. 저녁은 불족발이니까. 돌아와서도 매일이 여행이다. 나는 행복하다. 애써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 더욱 행복하다. 더 좋은 그림을 그려야지. 모든 결정에 후회가 없었던 멋진 여정이었다.





행복에 불안해하지 말기. 우리 모두 행복이 찾아오면 기꺼이 손을 잡도록 해요.







바르셀로네타 해변
바르셀로나 노을
그라나다 녹차
길거리
알바이신 지구
알람브라 궁전
네르하
말라가
비와 세비야
세비야 스페인 광장
신트라 헤갈레이라
호카곶
세상의 끝
리스본 트램
포르투
잊을 수 없는 거리 무도회
마드리드. 스페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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