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라니, 말도 안 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자다 새벽에 깼다. 일어난 김에 온라인 체크인을 마치고 일기를 적는다. 지금 여행을 끝내는 것은 아쉽지만 집에 가면 또 반갑고 좋겠지. 그리운 친구들 전부 만나고 싶다.
여기 호스텔 스텝은 정말 재밌다. 만날 때마다 친구~라던가 예쁜이~라고 하더니, 이내 화장한 모습을 보고 예쁘다! 했을 땐 웃음이 빵 터졌다. 눈을 마주치면 하트를 하는 저 귀여운 친구는 대체 뭘까. 머리는 대머리고 수염은 덥수룩해서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다. 아, 진짜 재밌다.
기념품 쇼핑을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트러플 올리브 오일과 바질 페스토, 알리올리를 샀다. 현금은 이제 15유로 남았다. 이걸로 점심도 먹고, 추로스도 먹고 저녁은 숙소에서 주는 프리 디너를 먹을 요량이다. 정산을 했다. 하루 평균 70유로를 썼구나. 절약하는 여행자들을 만나 내가 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닐까 했는데 딱 생각한 만큼 지출했다. 그래요. 저는 소액결제의 대가랍니다. 명품 쇼핑은 안 하지만 자잘한 물건을 계속 산다. 오늘 짐은 어떻게 싸지? 낡은 물건들을 버릴 생각에 신난다.
지금은 중국 음식점에 왔다. 마침 아시안 푸드도 먹고 싶고 가격도 싸다니까. 뭔지 모르고 시켰다. 면같은 것 위에 돈가스가 올라와 있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음식이다. 여긴 무려 초밥도 판다고. 후쿠오카 여행이 벌써 기대된다. 여러분, 저는 귀국 후 일주일이 지난 다음 또 후쿠오카를 간답니다. 아주 과거의 내가 기특해 죽겠다.
맛은 굉장히.. 먹어본 맛인데 뭐라 형용을 못하겠다. 엄청 배부르다. 옆 테이블을 보니 여성분들이 한 접시씩 다 먹었다. 대단..
오늘은 카메라를 두고 나왔다. 깨달았을 때는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냥 마지막 날이니까, 가볍게 다니지 뭐. 하는 심정으로 돌아섰다. 스페인에 와서 꿀 국화차를 많이 사간다고 들었다. 미루다 미뤄 그게 마지막 날인 오늘이 될 줄 몰랐다. 올리브 오일과 꿀 국화차를 각 2개씩 샀다. 마지막이 될 오렌지 주스를 마시기 위해 가게에 왔는데 3유로라니... 눈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 든다. 여기 사람들은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맥주를 마시는구나. 오늘은 나도 용기 내어 프리 디너파티에 참가하기로 했다. 용기는 개뿔, 사실은 그냥 돈이 없어서. 추로스 마드리드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먹고 싶었는데 가능할까. 배가, 돈과 시간이. 모르겠다. 소피아 미술관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낼지가 관건이다. 하. 3대 미술관을 다 보고 가는데 3일이 걸리는구나. 대장정이었다.
(이번 포스팅의 사진은 전부 전면카메라로 촬영하였습니다.)
게르니카 앞에서 글을 쓴다. 피카소 특유의 일그러진 드로잉에서 공포와 슬픔, 그리고 흑백의 색채에 절망이 느껴진다. 울부짖는 인간의 혀는 뾰족하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간다. 잘린 팔, 부러진 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압도적이다.
내 작업은 얄팍하기 그지없다. 밤에 찍은 듯한 깊은 색감, 표정, 생동감 있는 선, 생생하면서 개인적인 장면, 정적, 시선, 공포, 외로움, 구도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액자. 빛과 소리도 넣어야 한다. 바람까지.
아, 내일 떠난다니 엄청 아쉽다. 정말 과장이 아니고 이제껏 해본 여행 중 제일 좋았다. 이만큼 아쉬운 여정은 없었던 것 같다. 서울에 가면 전시를 좀 많이 봐야겠다. 미술관이 이토록 좋을 줄이야. 이제야 알았다.
이상한 순서로 관람했다. 처음부터 4층에 올라갔는데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중년 여성이 닫았다고 말해서 2층, 1층을 본 후 '아니야, 닫았을 리가 없어.' 해서 가봤는데 젠장. 3층, 4층 전부 열었고 더 좋았다. 모르는 사람 말 쉽게 믿지 말아야지.
지구와 달. 서로 공전하며 바라본다. 닿지 않는다.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기록된다.
The breathing leason.
초록색 벤치에 앉았다. 오늘이면 마지막일 무지 퍼셀, 마드리드, 내 여행. 아쉽다는 건 진짜 좋은 시간이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소화해낸다. 이곳에 머물며 나는 자주 서울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좀 누워볼걸, 벤치에 앉아볼걸, 전시를 더 가볼걸. 그래도 이틀 후엔 내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구나. 공기청정기가 지켜주는 작은 원룸. 집에 도착하면 방에 누워 책을 좀 읽어야겠다. 아아. 이제 추로스를 먹으러 가볼까나.
이 정도면 마드리드에서 실컷 하고 싶은 일 했다고 생각한다. 현금이 부족해 카드가 될까 조마조마했는데 된다! 야호! 이 집 추로스는 왜 느끼하지도 않고 맛있기만 한 걸까. 위층이 붐벼 아래층에 오니 나뿐이다. 분위기가 굉장하다. 뭔가 멈춘 지하철에서 먹는 느낌이야. 아아. 실수인 척 길게 잡은 이 여행이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기분이 든다. 첫날의 항공기 결항 빼고는 다 잘되었다. 아.. 나 너무 내가 기특해... 커피도 못 마시고 담배고 못 피우지만 여기선 새벽에 커피와 담배를 곁들이며 오래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어떤 프랑스인 가족이 왔는데 추로스를 먹으며 싸운다. 쉿! 하는 소리와 싸움 소리의 부조리가 웃기다. 쇼핑 거리를 걸어도, 그간 원 없이 뭔가를 산 덕인지 웬만한 것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좋은 산책이었어.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지. 마지막 저녁을 먹어야지.
짐을 싸는데 30분이 걸렸다. 나름 집중한 덕이지. 무게는 체감 25킬로인데 모르겠다. 봐줄지. 덜어내야 한다면 플랜 B가 있으니 괜찮다. 속이 좋지 않다. 폴리나가 주는 보드카를 너무 쉽게 두 잔이나 마셨다. 흥에 겨웠다. 어제의 투덜댐에 비해 오늘은 영어도 잘 쓰며 외국 친구들과 어울렸다. 폴리나를 드로잉 했는데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6월에 한 달만 여기 머물러서 같이 지내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농담이겠지.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여행을 마쳐간다. 좋았다. 눈앞이 흐리다. 걱정되는 것은 여행기간 동안 내내 안약을 넣지 못한 것이다. 녹내장이 있다. 자기 전 냉장 보관한 안약을 넣어야 한다. 여행 중엔 여건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했다. 돌아가면 내 방에서 차가운 안약을 넣고 눈을 감고 싶다. 그리운 나의 블루투스 스피커, 스탠드, 재즈 라디오. 돌아가는구나. 아쉽다. 아쉽지만 가고도 싶은 마음이라 뭔가 복잡하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 여행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잔뜩 그리며 삶을 유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