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적으며 놀란다. 뭐지, 내일모레면 한국에 간다고? 급히 남은 일정을 체크해본다. 톨레도는 못 가겠군. 마드리드엔 미술관이 정말 많다. 그리고 난 하루에 한 곳 정도 가는 것이 좋은 데 가고 싶은 곳은 4곳이 남았다. 무리해서 봐도 톨레도는 무리다. 어젠 잠을 늦게 잤다. 블로그에 올린 내 지난 일기를 찬찬히 살폈다. 재밌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퇴사하기 전엔 정말 힘들었다. 이 한 문장 안에 담기엔 차고 넘칠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그 시간이 있었으니 내가 이곳에서 눈을 떠 새로운 일기를 적을 수 있게 된 거라 생각한다.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일기는 정말 열심히 남겨야지. 언제나 지난날의 나는 낯설구나.
세 번째 가방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가방이 이번 여행에서 본 최고의 가방이라는 말밖에는. 사실 실용적인 물건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것의 정수는 가방이라 생각하는 병에 걸렸다. 나름 양심은 있는지라 30분을 고민했다. 그래, 현금과 카드를 섞자. 오늘의 50유로는 쉽게 날아갔다. 가방은 85유로짜리. 점심은 타이완 친구가 준 안성탕면을 먹기로 했다.
내가 스파이시 푸드가 그립다고 하니 받은 라면. 자기는 이제 타이완으로 돌아간다고 나중에 오면 꼭 연락 달라고 메일 주소도 받았다. 착한 사람. 나는 이게 맵다고? 하면서 끓였는데 내 입맛이 후퇴한 건지 조금 맵다. 어이가 없네. 불닭볶음면이 공산품으로 생산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왜 이래.
얼빈이 카메라가 멋지다고 했다. 당연하지. 이게 어떤 카메라인데. 마음껏 자랑을 했다. 그는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며 모델명을 가져갔다. 너도 샀으면 좋겠다.
지금은 프라도 미술관 앞이다. 톨레도 절대 못가. 부지런히 다녀도 마드리드 다 못 본다. 참 묘한 동네야. 특별할 게 없는데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네. 자, 이제 들어가 볼까. 미술관을 가기 전엔 좀 긴장을 해야 한다. 오래 걷고 생각해야 하니까.
미술관은 정말 좋았다. 고야의 그림은 소름이 끼쳤다. 무서우면서 슬프기도 했다. 그림을 보며 그때그때 관심 있는 작가의 정보를 검색해서 보니 좋았다. 프라도 미술관은 확실히 가이드 투어가 많다. 나는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아주 오래 볼 수 있는 자유 여행이 체질이야. 느긋하게 관람하고 공원으로 왔다. 마드리드는 뭔가 넓고, 느릿하고, 조용한 느낌이네. 녹음 아래에 앉아있음에도 풍경이 환하다.
숲 속에 숨었다. 이번 여행에선 부쩍 이어폰이 필요 없다. 새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하고 좋네. 여행이 정말 끝나가는 거야? 맙소사. 나 더할 수 있는데. 그간 3번의 유럽여행은 말미에 늘 집에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 있으면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아쉬운 게 있다면 제대로 취해보지 못한 것이다. 뭐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도 술 좀 많이 마실걸.
돌에 앉으면 따뜻하다. 여긴 무슨 천국같네.
저녁은 숙소에서 만난 한국분과 먹었다. 그래, 스페인 얼마 안남았는데 좋은 식사를 해야지.(가방 사서 프리디너 먹으려고 했으면서) 군대 가기 전에 온 여행이라 했다. 내 동생도 22살 군인인데. 어린 남자애들을 보면 자꾸 동생 생각이 난다. 옷 좋아하고, 같이 쇼핑해달라고 하고 뭐 그런거 말야. 귀엽다.
마드리드가 좋다. 와서 부쩍 서울 생각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서울 정말 좋지않나? 맛있는 것도 많고 편하고. 미세먼지만 빼면 살기 딱 좋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살고싶다고 자주 말하고 다니는데, 이건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할머니가 된 나의 생각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얼만큼의 내가 남을까. 나는 많이, 변할까. 좋아하는 노래들도 다 촌스러워지겠지. 그럼 나도 같이 촌스러워져야겠다.
나는 언제나 나였음에도, 지금이 정말 나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