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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Oct 01. 2015

장돌뱅이

어감이 좋은 것은 아니다만 실제로 두집에서 생활 하고있기에, 장돌뱅이처럼 늘 짐을 싸서 다닌다.


그나마 처음에 서울-나주를 왔다갔다 할때는 트렁크에 바리바리 싸서 다니던 것이 에코백으로, 쇼핑백으로, 이제는 그냥 핸드백 하나로 점점 줄어간다. 어제는 처음으로 핸드백 하나만 들고 나주 내려오는 버스를 덜렁덜렁 탔다. 어차피 금요일에 다시 올라갈 것이므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주로 내려오는 길은 뻥뻥 뚫려 조금도 막히지 않았다.


최근에 주민등록증이 어디있는지 잘 모르겠어서 신분증 대용으로 여권을 들고 다녔었다. 비행기니 뭐니 하는 것도 예약했어야 하기 때문에 사무실 또는 나주 집 책상 위에 올려다두었는데 서울에 가져간것 같기도 하고 안가져간것 같기도 하다. 결론은 없어졌다.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갑자기 행방이 묘연한 여권때문에 추석연휴내내 가슴이 싱숭생숭했다. 사실 싱숭생숭하거나 울렁울렁하거나 빙글빙글한 느낌은 다른 원인도 있을수 있겠다만 손에 잡히지 않는 여권때문이라고 생각하고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더불어 다시금 내려놓은 모든 기대들도 불면 또는 식욕없음을 타파해주었다.

어제 늦게까지 집의 책장을 뒤지고 오늘은 일곱시에 출근해 사무실 책상을 전부 다 뒤졌는데도 없었다. 분명 집 또는 사무실 책상 위 잘보이는 곳에 여권이 턱하니 놓여있는 것이 어른어른 잔상으로 남아있는데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없었다. 덕분에 청소만 실컷했다. 결국 오늘 오전에 시청에 가서 재발급을 받았다. 재발급을 받는 내내 집에 다시 가서 차분하게 찾아보면 왠지 다시 나올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비자 문제도 있고 이것저것 복잡해서 그냥 이만오천원만 내고 새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다행히 오랜 시간은 걸리지않는다고 한다. 5년 안에 두번 분실하면 일종의 패널티가 있는데 그마저도 없어진 여권 찾아오면 분실기록 삭제해주니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청에 사진찍는 기계가 없었다. 걸어서 15분 거리정도에 있는 롯데마트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행정업무를 보는 직원에게 시설 또는 서비스의 불편함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알면서도 '이놈의 촌구석은 신분증 발급하는 기관에 고작 사진찍는 기계 하나 없어서' 라는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곳이 지긋지긋하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졌던 차가운 똥냄새도, 먼지 날리는 이불 위로 눅눅하게 배인 땀방울도, 박자에 맞춰 춤을 추며 갈수록 빨라졌던 문장들도, 오렌지 꽃향기와 계속되는 진동소리, 언제나 진실하려 했고 진실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불에 데일만큼 뜨거웠던 날카로운 배신들, 날카로운 송곳니 아래로 계속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길 짓물러진 고름도.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미 너무나 잦아졌다.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다 없어져버려. 


기분좋은 가을바람을 한참이나 쐬며 평화로운 잔디밭을 바라보았으나 결국 수첩에 적어내려간 말은 다음과 같았다.

손안에 초능력이 쥐어진다면 나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멸망시킬거에요, 그리고 그 잔해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내 힘으로 고통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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