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트립 얼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버트 Apr 08. 2017

트립 투 런던 얼론-1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버스에서 트렁크를 끌어 내렸다. 중국 관광객 수가 급감한 인천공항은 정말 평화로웠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공항 수속을 거치는데 이렇게 적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처음이었다. 공항에서의 포켓 와이파이 수령 시간을 감안해 집에서 약간 일찍 나왔더니 모든 게 더 빨랐다. 너무나 극단적인 공항 상황때문에 이 모든 게 편하고 좋다는 생각보단 무서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짐을 부친 후 출국 수속까지 마치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았다. 면세장 안의 약국에 들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소염제를 한 통 더 사갈 참이었다. 여행 전 행사가 많아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는데 어김없이 공항 버스를 타자마자 코가 꽉 막힌 것이, 조짐이 좋지 않았다. 공항버스에서 자고 일어나니 잇몸도 땡땡하게 부은 기분이 들었다. 면세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잇몸이 계속 붓고 있었다. 몸이 이상신호를 알리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잇몸이 부어 응급실에 갈 정도로 크게 고생했던 3년 전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세 군데의 약국을 돌아다니며 '혹시 이 약도 잇몸 가라앉는데 도움이 될까요?' 하고 사흘 전쯤 처방받은 감기약을 들이밀었다. 약사들에게 잇몸이 부은데도 효과가 있는 약일테니 걱정 말고 좀 쉬라는 말을 듣자 그제야 마음이 좀 풀렸다. 얼굴 한 가득 덮고 있던 마스크를 조금 더 추켜 올렸다.


지연언니, 지혜, 민박집 사장님 등등 런던 날씨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시켜주었던 덕에 나는 겨울에도 잘 입지 않던 동생의 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을 함께 기다리고 있는 영국인들은 반팔 차림, 들뜬 여행을 앞두고 있는 한국인들은 알록달록 트렌치코트 차림이었다. 털 점퍼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쓴 나 혼자 영락없는 환자, 또는 오랜 시간 타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 막 귀국하는 사람 같았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끝없는 잠에 빠져들어 기내식도 건너뛸 뻔했다.





그래도 감기약을 먹고 잠들어서인가, 세네 시간에 한번 눈을 뜰 때마다 빠르게 가라앉는 잇몸을 느낄 수 있었다. 약의 힘이란 어찌나 무서운지. 결국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겠다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 리디북스 페이퍼와 맥북이 무색할 지경으로 곤히 잠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잠드니 확실히 기내가 건조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숨쉬기가 편했다. 중간에 눈을 떠도 10분 정도 몸을 뒤척이다보면 또 잠이 와서, 자도 자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만큼 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어느새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영국 입국 심사는 원래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게다가 최근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테러가 발생해 입국심사가 더 강화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영어에 자신없는 해외여행 쫄보-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비행기 바우처, 공연 바우처도 전부 다 출력물로 준비하고 입국 심사대에 섰다. 다행히 까다로운 것을 묻지는 않았다. 런던에서는 며칠이나 묵냐,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냐, 나이는 몇 살이냐(이때 나도 모르게 긴장해 한국 나이를 말하자 입국 심사하는 사람이 나의 얼굴과 여권을 대조한 후 눈썹을 치켜떴다. 나는 재빠르게 Korean Age라는 게 따로 있는데 우리는 연도에 집중해 나이를 센다고 말했다. 그의 미심쩍은 표정이 너무너무 무서워 빨리 입국심사대를 벗어나고 싶었다) 호텔은 어디서 묵냐 정도를 물어봤다. 질문은 긴 편이지만 걱정한 것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히드로 공항은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 러브 액츄얼리의 첫 번째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영국항공 비행기가 착륙한 곳은 터미널 5라고 했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제 숙소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민박집 사장님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지하철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며 저렴한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공항에 내리고 나니, 앞으로 8박 9일의 여행을 위해서라도 도저히 지하철을 탈 자신이 없었다. 여행 오기 전 부모님이 하사한 금일봉 봉투가 자꾸만 아른아른 떠올랐다. 우버 앱을 켜고 조회하니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10파운드-15파운드 정도 저렴한 비용이 떴다.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고 런던 시내로 들어가 우버를 잡는 것이나 여기서부터 우버를 타고 숙소로 도착하나 비슷한 비용이어서 우버를 타기로 결정했다.

일단 가방을 들고 공항을 한 바퀴 돌았다. 도무지 어디를 우버 스팟으로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런던에 도착했다는 설렘보다는 빨리 방에 들어가 가방을 풀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버스 정류장을 한 바퀴 돌았다가 주차장 스태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 명의 스태프는 피고 있던 담배를 짓이겨 끄고는 친절하게 나를 지하 일층까지 안내해주었다. 히드로 공항에는 여러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각 터미널마다 우버가 잠시 승차할 수 있는 구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곳에서만 우버를 탑승할 수 있다. 



히드로공항 터미널5에서 우버타는 곳. 지하주차장 1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탭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우버를 호출하고 10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상해에 갔을 때는 위챗 페이/알리페이가 없어 디디 추싱을 사용하지 못한 게 안타까웠는데, 영국에서는 피곤할 때마다 쉽게 우버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물론 공항 왔다 갔다 할 때 빼고는 우버 아예 안 탐) 이미 나 말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서 각자 자신의 우버 드라이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에 자리한 운전석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내 옆에는 초등학생 자녀를 포함해 다섯 명 정도의 한국인 가족이 우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차량이 먼저 도착했는데,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의 ‘저 까만 애 차야? 흑인이네? 차 더러운 거 아니야?’라는 말이 너무나 똑똑하게 귀에 때려 박혔다. <때려 박혔다>는 표현 말고는 더 이상 그 문장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너무 놀라 그들을 빠르게 뒤돌아봤다. 여자는 나와 여러 번, 꽤 오래 눈이 마주쳤지만 전혀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더듬더듬 드라이버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이 차 맞대, 타 타’ 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탔다. 타지에서 맞이한 이 말도 안 되는 발언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황당함, 놀람, 분노로 두근두근거렸다. 누군가 당장 총이라도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휑하니 사라지는 그 가족의 꽁무니를 보며 분노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어느새 내가 기다리고 있던 차량도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내 트렁크를 번쩍 차에 실어주었다. 영국은 거리명을 검색하는 것보다는 포스트 코드를 통해 길을 찾는 것이 더 보편화되어있다고 한다. 민박집(런던 더하우스)의 포스트 코드를 이야기하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니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향하는 길이 넓게 펼쳐졌다. 우버 드라이버는 친절하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봐주었다. 어디서 왔냐, 왜 왔냐, 친구네서 묵는 거냐, 런던은 처음이냐, 다른 곳은 어디 여행을 해봤냐, 음악 틀어줄까, 창문 열고 싶으면 열어라 등등.



드라이버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혹시 놓칠까봐 불안한 마음에...



그는 내가 North가 아니라 South Korea에서 왔다는 것을 듣고 너처럼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평균 월급이 얼마 정도 되냐고 너무나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원 헌드레드 유에스 달러?라는 말에 아니… 그거보다는 훨씬 더 받지 라며 대략적인 숫자를 이야기해주자 생각보다 너무 놀라 해서 민망했다. 내 월급이 많진 않지만 적어도 100달러보다는 많이 받는다고 하자 런던에서 굶지는 않을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가고 싶은 명소나 보려는 뮤지컬 예매 정도는 해놨지만 교통, 음식 등은 걱정할 틈도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여러 고민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는데 드라이버의 친절한 조언에 한결 마음이 풀렸다. 그는 긴장한 내게 ‘창문을 열어줄까?’라고 묻다가, 내가 머뭇머뭇 거리자 ‘I’m not your boss, I’m your driver, Please feel free’ 라며 친절하게 말했다.


내가 묵은 곳은 Warren street 근처였다. 구글 지도를 통해 보면 영국 동물원과 리젠트 파크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장소다. 드라이버는 ‘너 친구가 부자라 좋은 동네 사나 보다’고 말했다.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에서 가깝고, 잘 정돈된 깨끗한 주택가여서 내리면서도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았다. 포스트 코드로 내릴 곳을 찾고 사장님에게 문자 하자 사장님이 1층으로 내려왔다. 드라이버는 내가 내리는 순간까지도 ‘너 굉장히 polite 한 탑승자였으니 별점 5점 줄게’ 하고 유쾌하게 말했다. 나 역시 그에게 별점을 다섯 개 주었다.


내가 묵은 숙소는 3층이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건 아니지만 재작년 뉴욕에 방문했을 때 한인 민박집이 너무나 흡족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주저 없이 한인 민박을 택했다. 스타트업 지원기관 종사자로서 에어비앤비를 이용해보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었으나 마음에 드는 숙소는 여행기간 내내 묵기 어렵거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각종 한인 민박 사이트를 뒤져 꽤 깨끗한 1인 침실을 찾을 수 있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돼 후기가 적은 게 하나의 흠이라면 흠이었다. 민박 사이트뿐만 아니라 네이버 검색, 구글링을 열심히 하다 보니 한 여성이 ‘여기 후기가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정말 괜찮았어요’라고 코멘트 남긴 것을 발견했다. 날짜를 확인하니 여행 일정 내내(8박 9일)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교통편도 괜찮은 듯했다. 내가 여행 숙소를 고르는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통이며 두 번째는 여행 기간 내내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가 이다. 여행 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숙소까지 옮겨 다니며 신경 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두 조건에 적합한 숙소여서 별 기대 없이 예약한 곳인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인 민박 예약 사이트에 사장님이 올려둔 사진



그러니까… 나는 이 침대방이 내 방의 전부이고, 난로 공간은 민박집 공용공간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찍은 사진



알고 보니 이 두 개가 전부 내 하나의 방이었다. 테이블, 소파, 불은 때지 않을 벽난로와 책상까지 있는 멋진 방이었다. 약간 어이가 없어서 사장님에게 ‘아니 사장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보다 너무 좋잖아요ㅋㅋㅋㅋㅋㅋㅋ’라고 웃자 친절한 사장님은 ‘ㅋㅋㅋㅋㅋㅋㅋ전 잘 찍었다고 생각해서 올린 건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고 대답해주셨다. 이 숙소는 이번 런던 여행이 편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가장 첫 번째 이유였다. 방 사진을 찍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자 ‘아니 런던 한 복판 이 가격 이런 방이라고?’라며 그들도 웃었다. 부엌도, 화장실도, 샤워실도, 방도, 그리고 숙소가 위치한 곳도 모두 깨끗하고 마음에 쏙 들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어서 근처를 돌아보고 싶었다. 트렁크를 열어 가져온 코트를 옷걸이에 대충 걸어놓고 집을 나섰다. 우선 워렌 스트릿 스테이션에 가서 오이스터 카드를 샀다. 





우리나라 티머니 카드처럼 충전식으로 사용하는 이 오이스터 카드는 지하철에서 구입/충전할 수 있다. 오이스터 카드의 이름의 유래에는 약 네 가지 정도의 '썰'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홍콩의 교통 카드인 '옥토퍼스 카드'와 비슷하게 이름을 짓기 위해 '오이스터 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홍콩 메트로 카드를 '옥토퍼스 카드'로 이름지은 후 다른 교통 시스템의 이용 카드 이름을 모두 바다 테마 이름으로 지으려고 했다나. 그 외에도 오이스터(굴) 속의 진주를 발견하듯, 오이스터 카드와 함께 돌아다니다 보면 런던의 숨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오이스터 카드라는 썰, 오이스터가 템즈강과 연관이 있다는 썰,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에 등장하는, '세상은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The world is your oyster'이라는 서양 관용구에서 오이스터라는 단어를 따왔다는 추측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의 이야기가 제일 로맨틱하고 마음에 든다.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전인데 벌써 허기가 졌다. 숙소 근처를 돌아보니 파스타 집이 있어서 용기 있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설명이 꽤 그럴듯한 엔초비 파스타를 시켰고... 맛은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겠다. 영국에서의 첫 식사는 대 실패였다.



보기에는 그럴듯해보이는데...



숙소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24번 버스가 24시간 운행이라 굉장히 편했다. 이 버스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회의사당, 빅벤, 세인트 제임스 파크, 런던아이, 트라팔가 광장,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피카딜리 서비스, 차이나타운, 코벤트 가든, 소호, 대영 박물관, 캠든 마켓을 모두 지나는 버스이기 때문에 이미 많은 관광객이 애용하는 버스라고 한다. 






5시쯤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여러 관광지들의 야경을 즐기며 지나갔다. 시차로 인해 눈 뜬 시간이 반, 눈 감은 시간이 반이었다. 내가 느낀 런던의 거리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다들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생각보다 현대식 건물이 너무 없어 크게 놀랐다. 내가 생각한 도시보다는 조금 더 낮고, 정교하게 장식된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멀지 않은 슈퍼에서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를 샀다. 이불이 푹신하고 개운해 기분이 좋았다. 전기장판도 따뜻했다. 트립 투 런던 얼론의 시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트립 투 베를린 얼론-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