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민박집에서 하루에 하나씩 주는 작은 컵라면을 호로록 먹고, 토스트까지 구워 딸기잼을 발라먹었다. 커피도 한 잔 마셨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아침이 긴 탓이었다.
첫째 날은 정신없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런던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호를 지키지 않았다.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 건너기도 일쑤였다. 착한 서울시민인 나는 좌우를 휘휘 둘러봤다. 계속해서. 그리고 훌쩍 길 건너버리는 이 사람들이 혹여라도 2층 버스에 다치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막 다니는 보행자(?)를 위함인지 런던의 거의 모든 횡단보도에는 LOOK LEFT, LOOK RIGHT가 도배되어 있다. 습관적으로 오른쪽을 먼저 볼까 싶다가도 발밑에 크게 쓰여있는 글자 덕분에 어디를 먼저 봐야 하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유럽 내에서도 좌측통행을 실시하는 나라는 많지 안다고 하던데, 이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타지인을 위해서일까. 바닥에서 바래가는 글자가 괜히 고마웠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는 노란색 박스를 눌러야 신호가 빨리 바뀐다. 처음에는 이 벨이, 우리나라 횡단보도에 있는 것처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알림 벨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런 용도는 아니었다. 물론, 위에도 말했듯이, 어차피 사람들은 신호를 신경 쓰지 않고 건넌다. 3~4차선 정도 되거나 아이와 동행하고 있으면 그제야 누르고 기다리는 듯했다.
이 날 첫 일정의 시작은 '캠든 록 마켓'이었다.
캠든 록 마켓은 캠든 운하를 중심으로 조성된 마켓이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고, 비린내가 나며, 물도 썩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그러나 그 근처에 둘러앉은 사람들 때문에 괜히 낭만적으로 보이는 캠든 운하 옆에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 옷가게, 기념품 가게 등이 늘어져있다. 노상에 자리한 가게도 있고 공장지대 같은 어두운 건물 안에 자리한 가게들도 있다. 대체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념품 거리'에서 팔만한 것들을 판다. 영국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들, 옷, 화장품, 신발, 장식품, 시계, 차, 가죽용품 등등 썩 특별해 보이지는 않지만 특별해 보이는 그런 것들이 즐비해있다.
첫날이라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새벽에 깼다. 일찍 일어나 민박집에 놓인 런던 여행책도 뒤적거리다가 조금 일찍 집을 나서였을까, 캠든 록 마켓은 10시부터 본격적인 오픈인데 9시 30분에 거리에 도착하고 말았다. 하루 일과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돌아다니기에는 날씨가 쌀쌀해 일단 캠든 록 마켓 초입에 있는 카페 네로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럽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이탈리안 커피 전문점이라는데 유럽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내가 시킨 건 평범한 카푸치노. 콧물이 자꾸 나와서 이걸 크게 풀까 말까 고민하는데 옆의 두 영국인이 코가 떨어져라 킁킁대길래 나도 함께 시원하게 풀었다.
근데 솔직히 커피는 맛없었다.
숙소 주변에는 인도 카레 집이 많았다. 민박집 사장님에게 여기는 왜 이렇게 인도 카레 음식점이 많냐, 이 근처에 혹시 관련 기관이나 학교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보다는 '원래 영국 음식이 맛없어서 여기저기 인도 카레집이 많아요. 영국 사람들은 카레가 제일 맛있는 줄 안다는 말도 있어요'라고 했다.
카페에 있기 지겨워 10시 5분이 되자마자 다시 길을 나섰다. 캠든 록 마켓 오픈은 10시가 맞는 듯 하나 본격적으로 북적이는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는 11시는 되어서 방문해야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생긴, 썩 특별해 보이지만 썩 특별할 것 같지 않은 기념품을 판다. 그래도 워낙 많은 관광객이 오는 장소이고 곳곳에 신기한 가게들도 많아서, 마지막 여행 즈음엔 여기 와서 기념품을 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많이 걷는 여행의 제 1법칙. 가방은 항상 가볍게...
특히 이날은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념품을 사서 걸어 다닐 자신이 없었다. 세인트폴-테이트 모던 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러 갔다.
런던 지하철(튜브, 언더그라운드)을 타고 내려가는 길. 전 날 구입한 오이스터 카드를 이용하면 튜브도 손쉽게 탈 수 있다. 내 여행 루트는 소위 말하는 1 존 안에서만, 그리고 관광지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잘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만나곤 한다는 지하철 휴업이라던지, 노선 변경 등의 돌발사고는 겪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갈아타는 길들이 너무나 걷기 편하게 마련되어있어서 놀랐고, 지하철 의자도 푹신해서 타고 다닐만했다. 서울 지하철보다 훨씬 작고 아담하다. 지하철 안에서는 인터넷(물론 포켓와이파이도)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관광객은 사전에 노선을 잘 확인하고 타는 게 좋다.
지하철 안에서 사진 찍으면 탑승객들이 싫어할까 봐 찍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모바일로 텍스트를 읽고 있었고 몇몇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주 친절하게 방송, 안내해주기 때문에 웬만하면 역 지나치기 어렵다. 다만 지하철 노선 중에 몇몇 개는 같은 라인인데도 마치 신도림에서 까치산 가는 것처럼 중간에 역이 갈리기 때문에 타기 전에 이 지하철이 어디로 가는 건지 붙어있는 노선을 잘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 나를 런던까지 이끌어준 뮤지컬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있길래 사진 찍어봄.
지하철이 엄청 엄청 깊다는 느낌은 잘 안 들고 그냥 서울 정도인 것 같다.
세인트폴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내리자마자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껴 근처 트위스트 랩(?) 집으로 입성.
Turkish Shish를 시켰다.
영국, 런던에서는 영국 음식 빼고 다 맛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터키 랩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뭔가 멀리까지 여행 왔는데 엄청난 배신감.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했는데 들어가기도 전에 그 겉모습에 놀랐다.
날씨는 흐렸지만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기둥마다 멈춰 서서 한참을 올려다봤다.
성당 근처 정원엔 꼬마들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나 같은 관광객도 있고 저마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대체 무엇을 위해 왜 이렇게까지 어떻게 조각을 하고 그걸 여태까지 보존해왔을까. 알겠으면서도 모르겠는 일들. 대체 무엇을 위해? 왜? 왜 이렇게까지?
그런데 아뿔싸 특별 행사가 있다며 오후 한 시 반이 지나야 만 입장할 수 있다고 했다.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음) 세인트폴이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런던 내에서도 워낙 유명한 명소다 보니 행사가 많아서, 사전에 스케줄을 확인하고 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 나만해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그날 하루 종일 성당을 닫아두고 있어서 근처 기둥만 실컷 쳐다보고 돌아왔으니,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고 가시기를 추천드린다.
두 시간을 정원에 앉아서 시간을 때울까 했지만 너무 추워서, 일단 테이트 모던부터 보고 오자고 걸음을 옮겼다.
세인트폴 성당에서 밀레니엄 브릿지만 건너면 된다. 영화에서 많이 봤던 다리인데 솔직히 생각했던 것보다 진짜 작다. 다른 다리와 다르게 오로지 사람만 건널 수 있다. 이 다리가 무너지면 (물론 무섭겠지만) 헤엄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다. 다리가 무너지려면 하정우 나온 '더테러'정도 되어야 오금이 저릴 것 같다. 홍콩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다른 나라의 강을 볼 때마다 새삼 한강이 얼마나 넓고 크고 깊은 강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흐릿한 날씨를 최대한 담고 싶어서 보정하지 않았음.
그런데 다리 중간중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바닥의 껌딱지를 바라보고 있길래 나도 한번 허리를 숙여보았다.
띠용??????!
알고 보니 나름 유명한(?) 츄잉검 맨께서 그려놓은 작품들.
2104년 4월 기준으로 벌써 400개 정도의 껌딱지에 그림을 그렸고, 나는 못 봤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아트도 있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요청하는 내용을 담아주기도 한다고. 워낙 유명인인 데다가 바닥에 붙어서 작업하고 있으면 눈에 안 띌 수가 없으니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바닥을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모양이다.
세인트폴에서 15분 정도만 걸으면 바로 테이트 모던을 만날 수 있다. 특별 전시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이고, 무료인 다른 미술관/박물관과 달리 가방검사도 딱히 하지 않는다. 열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뭐랄까 근데 감옥처럼 생겼다.
막상 미술관에 입장하자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고 건물 자체가 깊다는 느낌이 물씬. 엄청난 규모의 설치미술 앞에 사람들이 잔뜩 누워있었다. 현대미술이 주가 되는 미술관답게 건물 자체가 구불구불하고 현대 미술품 같은 느낌이다. 뉴욕에서 들러보았던 현대미술관과는 또 다른 분위기.
어마어마하다.
솔직히 현대 미술을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별로 없는 나.
그로테스크한 작품들 앞에서 울상 짓는 아기들 표정을 따라 인상도 찌푸려봤다.
그게 어떤 작품이건 그 스케치를 보는 게 제일 좋다.
다른 것들은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나마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여성과 노동을 다루고 있던 갤러리. 여성의 시각으로 다루어지는 여성 아티스트,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삶과 관련된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특정 산업군에서, 또는 특정 지위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는 요즘으의 유진에게 몹시 반가운 전시였다. 영어를 좀 더 잘해서 슥슥 설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게릴라 걸스는 뉴욕에 베이스를 둔, 여성 익명 예술가들로 구성된 모임이라고 한다. 게릴라 걸스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하다던, 앵그르가 그린 여성 뒷모습을 패러디한 포스터도 볼 수 있었다. "Less than 5% of the artists in the Modern Art sections are woman, but 85% of the nudes are female."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어서 엽서도 샀다.
게릴라 걸스라는 존재 자체는 학교 다닐 때 여성학 수업에서 언뜻 들은 기억이 나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 이 사이트를 참조했다(http://maumsan.com/cul/girls01.htm)
우리나라에도 이미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라는 책이 출판되어 있는데, 이 책의 추천서에서 경기대학교 교수이자 미술평론가인 박영택 교수는
"1970년대 초 이후 미술계에서 페미니즘 담론이 대두되었다. 이를 통해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기존의 미술사가 남성 중심적으로 기술되어왔으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미술비평과 작품 활동이 시도되고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 위치한 그룹이 바로 게릴라 걸스다. 이론과 실제 두 영역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해온 게릴라 걸스가 쓴 이 책은 기존 미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내용뿐 아니라, 모든 차별적인 권력구조 자체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하는 인문학 서적으로서도 모자람이 없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 또 한 권 추가되었다. 맨날 추가하기만 한다는 게 슬프지만....
사실 미술관에서 사진 찍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런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작품 몇 개는 찍어보았다.
이런 것들은 정말 좋아서 다시 화실 다니고 싶었고 다시 그림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해서 찍어보았음.
기념품 가게가 마치 미술관 관련품 편집샵처럼 되어 있었다. 엽서나 배지, 자석보다는 오히려 관련 책들을 더 많이 팔고 있길래 깜짝 놀란 맘, 신기한 맘으로 찍어보았다. 런던에서 방문한 많은 기념품샵들이 이런 형태를 띠고 있어서 더 놀랐다.
박물관을 벗어났다.
주말에 가면 공짜인데 구우욷이 일정 때문에 부득불 평일에 가느라 25파운드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세인트 폴 대성당 보러.
미술관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날씨가 흐렸는데 갑자기 너무나 좋아진 날씨.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런던의 변덕...
갑자기 너무 쨍해져서 놀랐다. 다시 15분 걸어서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가는 길.
세인트폴 대성당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글밖에 없다. 헬렌 아널드가 쓴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휴양지 1001'에 따르면, 세인트폴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공습을 끄덕 없이 버텨내어 런던 시민들의 상징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런던 시내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축물로 남아있다고. 1666년 런던 대화재로 대성당이 불탄 이후 교회는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에게 세인트폴 대성당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크리스토퍼 렌은 간결함과 청렴함의 상징인 첨탑 형식(고딕)의 성당을 지어달라는 교회의 의견과 정 반대되는, 커다란 돔을 올린 화려한 바로크식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1203&cid=42866&categoryId=42866)
실제로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 너무나도 화려한 모습에 깜짝 놀랐고, 웅장함에 두 번 놀랐다. 천장 위에 아찔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돔 주변으로 화려하게 벽면이 장식되어 있었다. 25파운드 안에는 음성 안내기기 대여 값이 포함되어 있으며 한국어 기기도 친절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음성 안내기기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성당 안을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다.
돔 아래 팔각대 모형 위에, 성경의 한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그려져 있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였다.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울도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그는 예수를 가짜 메시아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예수가 죽고 난 이후에도 제자들이나 그 외 전도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이들을 괴롭히며 죽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부활한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생기는 것을 보고, 가짜 메시아가 진짜 기독교인들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신앙인 스데반 집사 등이 돌로 맞아 죽는 순간에도 이것이 가짜 메시아를 믿는 자들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며 돌아다니던 사울은 어느 날 예수를 믿는 신도들을 탄압하러 간 다메섹이라는 지역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예수를 가짜 메시아로 손가락질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선교의 역할을 가장 앞장서서 하게 되는, 전 세계로 선교 여행을 다니는 사도가 되었다. 성경에 포함된 63권 중 무려 14권을 바울이 썼다고 한다. (성경 자문: 장부장님)
다빈치 코드에 나올 법한 성당의 비상구 길을 따라 정말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돔 천장을 직접 만나볼 수도 있다. 다만 그 웅장함과 높이에 놀란 나는 올라가자마자 메슥거림을 호소하며 1분 만에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여러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자리한(?) 지하의 전시관은 차라리 조용한 전시관 느낌이 든다.
종교 알못 성경 알못인 나지만 성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나 그 웅장한 분위기 때문에 기가 눌려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저마다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바라보는 그 장면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신앙이란, 그리고 그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대체 무엇이관데 몇백 년 전에 이런 신비한 건물을 지어낼 수 있었던 건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이 다음은 어딜 갈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처럼 여행 전 모든 일정을 30분 단위로 짜놓는 사람들은 이렇게 여행 일정이 갑자기 비어버리면 작은 패닉이 찾아온다. 원래 계획은 세인트폴-테이트 모던-야경 보러 타워브리지였는데 세인트폴과 테이트 모던의 순서가 바뀌어 버린 데다가 야경을 보러 가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결국... 정욱 님이 한번 들러보면 어떻겠냐고 슬쩍 제안해주신 캠퍼스 런던을 구글맵에 찍었다. 테헤란로 펀딩 클럽 3회에서 DSC인베스트먼트의 윤건수 대표님이 자고로 보스가 시키면 원래 하고 싶었던 것도 안 하고 싶어 지는 게 정상이라고 했지만... 정욱 님에 대한 팬심으로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구글 캠퍼스 런던으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로 멀지 않은 곳, 쇼디치 근처에 있었다.
구글캠퍼스는 구글에서 운영하는 스타트업 지원 공간으로 서울에도 삼성역에 구글캠퍼스 서울이 자리잡고 있다. 전 세계 여섯 곳, 런던, 마드리드, 상파울로루, 텔아비브, 바르샤바, 서울에 구글캠퍼스가 있다. 캠퍼스 서울에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캠퍼스 카페와 스타트업들의 협업공간, 주요 이벤트 공간, 아이디어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디바이스랩, 소규모 이벤트 공간/강의실 등이 있으며 구글 캠퍼스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은 6개월간 캠퍼스 서울의 사무실을 사용하며 다양한 네트워킹 및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다(모두 캠퍼스 서울 사이트 참조, https://www.campus.co/seoul/ko/about)
친절한 직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면 아이패드를 준다. 아이패드에 내 신상정보를 입력하고 나면 이렇게 출입증 카드를 준다.
이 카드만 있으면 일주일 동안 전 세계의 구글 캠퍼스들을 방문할 수 있다고 한다. 어차피 캠퍼스 서울에는 아는 분들이 있고, 다른 전 세계 캠퍼스를 방문할 일은 없으니 나갈 때 반납하려고 했는데 기념품으로 생각하고 가져가라는 말에 냉큼 챙겨왔다.
그런데 난 캠퍼스 런던에 정식으로 입주해있는 스타트업이나 정식 등록된 멤버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지하 일층의 카페와 디바이스 랩, 로비의 리셉션과 메인이벤트 스페이스를 제외한 공간은 방문할 수 없다. 지하 일층으로 내려가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독서실 분위기라서..... 다들 너무 자리에서 조용히 일하는 분위기라서 당황했고....
캠퍼스 런던의 포스터 포맷이 캠퍼스 서울 포스터 포맷과 비슷해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결국 삼십 분 정도를 얼쩡거리기도 하고 화장실도 한번 써 보고 자리에도 한번 앉아봤다가 쭈뼛쭈뼛 일어섰다.
쇼디치 근처였다.
사실 쇼디치인지 모르고 걷는 중이었는데 벽화가 멋있길래... 아 여기가 벽화가 유명하다던 쇼디치구나 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다 싶어 일단은 쇼디치 근처의 PRET으로 들어갔다.
프레타 망제는 샌드위치, 샐러드, 수프 등을 파는 가게인데 런던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진출해있는 패스트푸드 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음식이 패스트푸드 점 음식이라고 하기는 좀... 너무나 건강식이다. 심지어 비건들을 위한 메뉴도 잘 준비되어 있고 프렛 비건 식당도 따로 있다. 랩, 커피 등도 함께 판다.
나는 닭고기-브로콜리 수프와 강낭콩-아보카도 컵 샐러드, 그리고 랍스터-아보카도 샐러드를 샀다. 심지어 수프와 강낭콩 컵 샐러드만 먹었는데 배가 불러서 아보카도 샐러드는 집에 들고 왔다. (앞으로 나는 런던에서 아주 아주 여러 번의 끼니를 프레타 망제와 함께하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 보며 구경도 좀 하다가.
버스 타고 타워브리지로.
아 아름다웠다. 날씨도 좋고.
가까이서 본 타워브리지.
아주 솔직히 말하면.
강도 생각보다 너무 작고. 다리도 생각보다 좀 작아서... 웅장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예뻤다. 진짜 동요 속에 나오는 공주님 왕자님 지나가는 다리 같았달까.
그리고 사진은 역시 지나가는 한국 여자들에게 찍어달라고 하는게 가장 잘(내 눈에 흡족하게) 나온다.
여기저기 찍어보며 하염없이 강변을 걸었다.
끝까지, 도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 나와있는 건지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던, 길가에서 술 마시는 영국인들.
강가에 이런 멋진 건물들도 많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문 닫았을 게 뻔한 버로우 마켓 쪽으로 향했다.
그냥 마냥 걷고 싶어서.
런던은 너무 아름다운 도시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또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혼자 길게 먼 곳까지 다녀온 여행지는 꼴랑 뉴욕과 런던밖에 없으니 이 둘을 자꾸 비교하게 됐다. 뉴욕은 혼자 온 배낭여행객도 많고 전 세계 외국인들이 다 씩씩하게 찾아온 느낌이었는데, 런던은 뭐랄까 가족단위 여행객이나 친구끼리 온 여행객들, 또는 연인들이 많은 느낌이어서 혼자 온 내가 정말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 길가의 레스토랑이나 바를 지나갈 때만 해도 그랬다. 뉴욕은 누구나 다 혼자처럼 보이고 다들 개인적으로 보여서 오히려 혼자 찾은 여행객으로서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정작 런던은 모두가 너무 화목해 보여서 내가 혼자 오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밤이 깊어오니 불빛이 아른아른해서 외롭다는 생각이 오히려 덜했다.
다시 찾은 테이트 모던 갤러리 앞에는 버스킹이 한창이어서 옆에 앉아 한참을 들었다.
하루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