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벨로 마켓, 아니 그보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라는 두근두근 일정이 차있던 토요일. 조금 일찍 일어나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아니 사실 시차 때문에 오전 네시면 말똥말똥 눈이 떠졌다. 전 날 저녁 먹다 남은 PRET의 강낭콩 샐러드와 누텔라 바른 토스트를 야무지게 섭취했다. 옷을 단단히 껴입으면서도 더 입을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챙겨 온 히트텍을 입었다. 런던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늦게 들어와야 하는' 토요일이었다.
포토벨로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포토벨로 마켓의 오픈 시간은 (토요일) 9시, 출근시간과 거의 맞먹게 집에서 나와 열심히 걸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후 3시까지 빅토리아 스테이션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다행히 숙소에서 포토벨로 마켓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 잡아탔다. 런던에서 관광객의 신분으로 지내려면 2층 버스의 맨 앞자리를 사수하는 것이 덕목이겠지만 이날은 2층에 자리가 없어 그냥 1층에 앉아있기로 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8박 9일간 런던을 여행하며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장애인을 위한 교통시설이었다. 이날 버스 안에서 풍경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포토벨로로 가는 버스를 타고 창 밖을 구경하는데 한 정류장에서 '위잉'소리가 잠시 나고는 문이 금세 닫혔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휠체어가 타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서울의 시내버스에 휠체어가 탑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더라. 우선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버스가 한참 정차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운전수가 뒤로 왔다가, 때로는 탑승객들이 더 힘을 더해야 하기도 한다. 그럼 어느새 버스가 정차해있는 시간이 꽤 흐르고, 어떤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탑승한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은 머쓱한 표정으로 또는 미안한 표정으로 또는 무의미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허공을 응시해야 한다. 나 역시 언젠가는, 속으로 작게 '아 왜 빨리 안가'라고 투정 부리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지하철에서도 마찬가지다. 계단에 마련되어있는 휠체어는 시끄럽고, 역무원의 노동 투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휠체어는 뭐랄까, 그것을 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시선이 가는, 또는 번거로운, 또는 안쓰러운 존재였다.
이 곳은 내가 원래 있는 곳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나 손쉽고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버스가 아주 약간 기우는가 싶더니 정말 가볍고 쉬운 발판이 마련되었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그 발판을 타고 들어와 문 바로 옆에 가서 섰다.
휠체어라는 그 세 글자가, 그리고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늘 들어왔던 그 이야기나 배움이 무색하게 이곳의 휠체어는 너무나 조용히, 편하게, 빠르게 들어와 섰다. 발판은 역시 빠르고 쉽게 접힌다. 버스는 금방 출발했다. 마치 이전의 다른 정류장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 누구도 더 품을 들이지 않았다.
2016년 11월 시사저널의 기사에 따르면(http://www.huffingtonpost.kr/beminor/story_b_12856716.html)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버스를 타려면 계단 없는 저상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저상버스 자체가 전국에 많이 없다 보니 장애인들이 아예 버스를 탈 엄두조차 못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주 한국일보에서 아주 자세하게 보도해준 기사에 따르면(http://www.hankookilbo.com/v/f1925707d4364e14b20bb3c1d919e36b, 이 기사는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휠체어가 이용할 수 있는 저상버스는 가뜩이나 부족한데 그마저도 고장이 나있고 잘 도착하지도 않는다. 그에 반해 런던에서 만난 버스는 모두 계단이 없는 버스였고, 버스 1층의 공간은 비효율적으로 보일만큼 휠체어와 노약자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촌스럽게도 이 발판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여행 다니는 내내 이 발판이 움직이는 것을 계속해서 구경하고, 찍었다. 이 발판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의 런던 구경기에서도 한번 더 등장할 예정이다.
포토벨로 로드 마켓은 노팅힐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마켓이다. 길에 자리하고 있는 일반 상점들은 평일에도 운영하고 노점상들은 토요일에만 운영하는데, 나는 이곳이 정말 정말 좋아서 나중에 평일에 한번 더 가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거리를 빼곡 채운 노점상에서는 빈티지 아이템들과 각종 기념품, 그리고 다양한 세계 음식들을 판다. 관광객도 많고 현지인도 많(아 보인)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걸어가는 장면, 그리고 러브 액츄얼리에서 스케치북으로 고백하던 장면들도 이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이날 하늘이 뭐랄까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어딜 가나 한국인 관광객은 많다. 그래도 혼자 여행 다니다 보면 가끔씩 만나는 한국인 관광객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고, 사진 찍어주는 한국인 관광객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이 아래로 사진 엄청 많음)
이런 기념품은 오히려 흔한 편이다. 어떤 중국인 관광객 무리가 가판대 앞에서 잠시 서성이더니 세 개 정도의 가방을 결제했다. 이게 바로 역수입 아닐까...라고 의심을...
진짜 세계 음식을 판다. 런던에서 주말이고 평일이고 정말 많은 푸드 트럭들과 길가의 음식점들을 봤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이 맛있는 음식들을 구경하며, 지금은 좋은데 비 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런던에서 비를 한 방울도 맞지 못해서, 이 많은 가판대가 어떻게 피신하고 장사를 계속하는지는 살펴보지 못했다.
기념품이 결코 싼 편은 아니다. 그래서 기념품 구경보다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과일, 채소, 치즈, 햄, 오일 등을 보는 게 훨씬 더 재밌었다.
이런 거.
오일도 정말 많다. 팔고 있는 버섯 종류만 해도 어림잡아 훌쩍 스무 개는 되었다.
길에서 공연도 많이 한다.
이중섭...?(* 고등학교 때 문학시간에 들었던 수많은 얘기들 중 담배 은박지에 그림 그린 이중섭이 제일 로맨틱하다. 이 그림들이 진짜 담배 은박지에 그려진 건지는 확인 하지 못했지만 시가렛 카드라는 말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나서...) 알고 보니 시가렛 카드라는 게 이중섭처럼 은박지에 그린 그림은 아니고, trade cards issued by tobacco manufacturers to stiffen cigarette packaging and advertise cigarette brands라고 한다(출처: 위키피디아)
포토벨로 마켓에 처음 들어가면 식재료, 음식 등의 노점상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고 그 길을 지나면 기념품 가게가 나온다. 기념품 가게 끝까지 올라가면 이 거리의 오래된 가게들이 나오고 양 옆으로 예쁘게 자리한 파스텔빛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지나가던 한국인 관광객들을 붙잡고 사진 한 장 부탁. 자신들끼리 번갈아가며 사진 찍는 한국인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 '사진 찍어드릴까요?'라고 묻고, '저도 한 장만...'이라며 부탁하는 것이 제일 좋다.
a.k.a. 군인 포즈
기념품 구경.
포토벨로에서 엄청 유명하다던 지도 집.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지도고 대량 생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희소성도 있다고. 그러나 들어가서 한참을 뒤적여봤음에도 썩 사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무엇보다 무지 비쌈.
(영화) 노팅힐 같은 하늘.
이런 골목들도 나온다.
제일 맛있어 보였던 초리조와 양파, 감자볶음.
길을 돌아가서 제일 맛있어 보이던 초리조를 먹으러 갔다. 초리조, 초리조와 함께 볶은 양파, 깍둑 설기 해서 소금 후추와 함께 구운 감자... 그 위에 마요네즈.... 머 맛없을 수가 없지 않나요?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도 못했는데 포장을 부탁하니 몹시 친절하게 잘 싸주었다. 남은 음식은 하루 종일 잘 들고 다니다가 다음날 아침에 토스트와 함께 먹었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일하던 서점. 여기서 줄리아 로버츠를 처음 만남. 지나가는 사람 모두 이 앞에서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내부 모습은 영화와 다르다. 알고 보니 서점 문은 여기서 찍은 게 맞는데 서점 안은 할리우드에서 별도로 마련한 세트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래도 유리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멋스러웠다.
잠깐 커피집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빅토리아 스테이션까지 가기 전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빅토리아 스테이션과 그다지 멀지 않은 사치 갤러리를 구경 가자고 결심. 역시나 포토벨로 마켓에서 사치 갤러리로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사치 갤러리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멋진 벽돌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치 갤러리가 위치한 런던 첼시는 집값도 제일 비싸고 물가도 가장 비싼, 런던의 부촌이라고 하던데 과연 깨끗하고 갠쥐나는 런던 길거리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길 가는 중간중간 명품 스토어도 만날 수 있었다.
사치 갤러리는 영국의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 찰스 사치라는 사람이 만든 갤러리인데 주로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다소 삭막해 보이는 건물 외형 안에는 아주 깨끗한 전시관들이 마련되어 있고 미디어 아트부터 시작해서 각종 사진들, 그 외 설치 미술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마련되어 있다. 기존의 유명한 현대 미술 작가들 작품도 전시하지만, 신인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전시해 명성이 높다. 입장료도 무료고 가방 검사도 안 해서 부담 없이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다. 전시관이 엄청나게 많은 편도 아니라서 금방 보고 나오기도 좋다.
내가 갔을 때는 <인물 사진> 또는 <인물의 모습>을 주제로 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바쁘고 힘들고 지쳐서 설명을 일일이 읽어보지는 않았고 지나다니며 인상적인 작품들만 몇 개 골라서 오래 쳐다봤다(...) 사진을 사진 찍는 할아버지를 사진 찍는 나.
다른 갤러리들보다 유독 더 깔끔한 인테리어.
어두운 방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면 CCTV가 그 위치를 파악하고 확대했다가 작아졌다가 한다.
혼자 온 사람은 나뿐. 그래도 attraction!
화장실도 들르고 기념품 가게에서도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나오니 어김없이 사치 갤러리 앞에서도 푸드 마켓이 열렸다. 대체 런던은 왜 이렇게 푸드 트럭이 많은 건지 궁금했다. 영국 음식이 맛없기로 정평이 나있는 만큼,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푸드 마켓에는 정말 엄청나게 다양한 세계 음식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맛있게 먹었던 것은 할랄 푸드들...
팔라펠 또 먹고 싶다.
디저트도 팔고.
집에서 만든 잼류도 판다.
푸드마켓 옆에는 진짜 '슈퍼'가 있는데, 동네 슈퍼에 대체 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치즈 종류가 있는 건지...
무려 캐비어 시식행사를 하길래 동네 사람인척 옆에서 얻어먹어보고.
다시 햄과 치즈 구경.
나와보니 노점에서 샴페인을 한 잔씩 팔길래.
사치 갤러리, 푸드마켓을 떠나기 전 한 잔 주문해 자리에 앉아 홀짝였다.
다소 충격적이었던 것이... 내 양 옆 테이블에서 너무나 쿨하게 생굴을 시켜 한 접시씩 먹고 있었는데 그게 참 신기했다. 월 이름에 R이 들어가면 굴을 먹을 수 있는 계절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9월~4월,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 January, Feburary, March, April)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추운 날씨가 아니면 잘 안 먹게 되는 게 생굴이다. 혹시 삶거나 얼린 건가 싶어 염치없이 흘끗 흘끗 쳐다봤는데도 누구든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이 생굴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이 날씨에 길에서 파는 생굴을 먹는다? 배탈 난다고 엄마한테 등짝 세대 맞고도 남을 일인데...
우리나라는 서양에 비해 굴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굴이 몇십 종류도 더 되기 때문에 oyster bar에 가면 진짜 신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신 적은 종류를 대량으로 양식하기 때문에 서양에 비해 훨씬 값싼 가격으로 굴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JTBC 비정상회담에서 나온 패널들도 한창 굴 얘기를 한 적이 있었고. 이 사람들이 먹는 굴은 내가 한국에서 먹던 굴이랑 다른 건가, 그래서 지금 이 4월에도 길바닥에서 먹을 수 있는 거겠지?라는 어림짐작만 해보았다. 나도 한 접시만 먹어볼까 하다가 곧 타러 가야 할 해리포터 스튜디오 행 버스 안에서 참사를 맞이할까 봐 쫄보 정신을 발휘해 잘 참았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빅토리아 스테이션으로 향해야 될 때가 왔다. 가방을 갈무리하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