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기 전, 이미 봄

3월 보이지 않는 자람

by 마음과 정원

봄이 오면 정원의 식물들은 불현듯 나타난 것처럼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리였는데, 어느 아침 작고 여린 잎이 흙을 밀고 올라와 있다. 정원의 계절을 몇 번 지나고 나면 저 잎이 어떻게 자랄지 어렴풋이 가늠이 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놀랍다. 매년 놀라움은 계속될 것 같다.



3월의 정원은 서서히 일어나는 식물들이 있다. 수선화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국화와 톱풀이 낮게 새순을 올리고, 가을에 심어둔 구근들이 슬슬 땅을 밀어 올리는 계절. 이 무렵 정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년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수국 보온재를 언제 벗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수국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목수국처럼 그해에 새로 자란 가지에서 꽃을 올리는 당년지 수국은 겨울을 나고 그해 올라오는 꽃눈으로 한 해를 보낸다. 하지만 전년지 수국은 다르다. 지난해 자란 가지에 이미 꽃눈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가지를 온전히 살려야 올봄에 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짚단이나 커피포대 부직포 등 가드너가 선택한 보온재로 감싸주고, 봄이 되면 적절한 때에 벗겨줘야 한다. 너무 일찍 벗기면 늦서리에 꽃눈이 상한다. SNS에는 매년 이맘때 보온재 아이디어가 올라오고, 언제 벗겨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저마다의 지역, 저마다의 정원, 저마다의 감각으로 봄을 가늠하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 타이밍을 몰랐다. 너무 일찍 벗겨서 꽃눈을 잃은 적도 있고, 우물쭈물하다 새순이 보온재 안에서 구겨진 채 올라온 적도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매일 자연을 관찰하며, 꽃이 피는 날짜만으로 그달의 며칠인지 이틀 오차 안에 맞혔다고 했다. 나는 정원을 몇 해 돌보고 나서야 겨우 우리 집 수국이 언제 보온재를 벗어날 준비가 되는지 알게 됐다. 그것은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해를 그렇게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씩 내 정원의 봄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 해마다 들여다보고, 틀리고, 다시 보면서 익히는 것의 반복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봄이 사실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늦가을에 심어둔 튤립 구근은 추운 겨울 내내 땅속에서 조용히 몸을 만들고 있었고, 전년지 수국은 보온재 안에서 꽃눈을 품은 채 봄을 기다렸다. 지상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국화와 톱풀도 이제 제자리를 찾아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 식물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동안에도, 올해의 자기 몫을 위해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 식물들은 봄이 오기 전, 이미 봄이었다.


보라 꼬리풀의 성장


곧 피어날 수선화


성장세가 남다른 톱풀


애지중지 겨우내 돌봄이 필요한 수국


곧 채워질 장미정원


묵묵히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것은 식물만이 아니다. 애써도 결과가 보이지 않고, 노력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간들. 돌아보면 그냥 삽질이었나 싶어 씁쓸해지는 날들도 있었다. 변화는 눈에 보여야 하고, 어떤 일 뒤에는 성장해야하고, 노력은 빠르게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원을 몇 해 돌보며 시간을 보내고 나를 돌아보니 닮은 구석을 찾게된다. 보온재 안에서 조용히 꽃눈을 지키던 수국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것. 삽질인가 했던 그 시간들이 엉뚱한 낭비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만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어떤 일도 나에게 돌아올 의미를 생각해보며, 기꺼이 받아들이고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이 생겼다.


식물이 땅속에서 조용히 자라듯, 나에게도 그런 자람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조금 믿게 된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들은 지금도 천천히 준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3월의 정원은 아직 수줍다. 여전히 수줍고 미숙한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