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을 건너는 단단함 꽃
대림원예종묘 앰배서더로 활동하며 처음 만난 꽃, 겨울에 피는 헬레보루스. 보통 식물들에게 좋은 날씨가 아닌 겨울에 피어나는 귀한 꽃들에겐 더 단단함이 느껴진다.
헬레보루스는 진한 깊이감 있는 색감에 고개를 살짝 숙여 피어 있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며칠째 가까이 두고 들여다보니 볼수록 더 빠져드는 색과 모양이었다. 겹겹이 쌓인 꽃받침, 두툼한 줄기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 겨울 식물에게서 느껴지는 밀도가 묵직했다.
헬레보루스를 공부하다 찾게 된 글에서, 영국의 식물 작가 Ruth Goudy는 이 꽃을 두고 "She's a tough, old girl."이라고 표현했다. 기품 있는 노현자 같은 꽃, 단단한 마음과 지혜가 담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노년 추구미가 담긴 꽃의 인상이라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단단함과 기품의 꽃을 만났다.
"해로운 음식"이라는 이름 그리고 비워냄의 치유
헬레보루스의 학명은 Helleborus. 이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hellébor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helein(해치다)과 bora(음식)의 합성어, 즉 "해로운 음식"이라는 뜻이다. 독성을 지닌 식물이라는 의미가 이름에 이미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헬레보루스는 단순히 위험한 식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광기와 우울을 다스리는 약초로 기록되어 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헬레보루스를 사용해 몸 안의 과도한 체액을 배출하면 마음도 함께 맑아질 것이라 믿었다.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었지만, 그만큼 강하게 '비워내는 힘'을 가진 약초로 여겨졌던 것이다.
치유에서 비워냄이란 중요한 의미다. 헬레보루스는 그런 역할을 한 식물이다. 실제로 현대 연구에서도 헬레보루스는 진정 효과, 항정신병 작용, 항우울 효과를 지닌 것으로 약리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신화 속 헬레보루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헬레보루스는 등장한다. 그중 재미있었던 내용은 아르고스 왕 프로이토스의 딸들이 신을 모욕한 죄로 광기에 빠졌을 때, 멜람푸스가 헬레보루스를 이용해 그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딸들을 구하기 위해 사용한 식물이기도 했다.
또 헬레보루스는 마법과 경계의 여신 헤카테(Hecate)의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헤카테는 마법, 마술, 밤, 달, 그리고 강령술의 여신이자, 하늘과 땅과 바다에 대한 권능을 가졌으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지하세계의 여신이다.
"헤카테의 정원"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정원에는 아스포델, 만드레이크, 사프란과 함께 헬레보루스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경계와 변환의 여신이 가꾸던 정원에서 자라던 식물. 치유제이자 독약,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식물. 헤카테의 정원 속 헬레보루스를 상상해본다.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친구들
헬레보루스는 미나리아재비과(Ranunculaceae) 식물이다. 라넌큘러스, 아네모네, 담장을 타고 오르는 클레마티스가 같은 식구다.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의 특징 중 하나는, 꽃잎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사실은 꽃받침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헬레보루스 역시 색을 띠고 오래 남는 부분이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다.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헬레보루스의 꽃잎은 꿀샘(짧고 깔때기 모양의 꽃 기관)으로 변형되었다. 꽃으로 보이는 꽃받침 덕에 개화 기간이 길고, 색이 천천히 깊어지며 남는다.
헬레보루스를 이해하다 보니 이 과의 식물들이 가진 공통된 결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개화는 12월부터 시작해 3~4월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먼저 핀 꽃 아래에서 새로운 꽃대가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꽃을 오래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에 꽃을 올리는 모습 때문에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별명이 있지만 한국 정원에서는 겨울이 아닌 이른봄에 꽃대를 올린다고 한다. 3,4월 꽃을 피우다 꽃이 없는 5월부터 11월까지도 잎은 관엽식물처럼 두껍고 싱그럽게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사계절 내내 존재감 있는 꽃으로 사랑받는다.
헬레보루스는 음지를 좋아하지만, 호이거사 육종 품종은 살짝 양지도 괜찮다고 한다. 물 빠짐 좋은 흙의 반양지, 밝은 그늘이 맞는 꽃이다. 집 안에서 조금 더 즐기다 3월쯤 단풍나무 아래로 옮겨 심어볼 생각이다. 전국 노지 월동이 가능하지만, 첫해에는 찬 바람을 조금 막아주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계절을 온전히 통과하는 시간
모든 식물이 그렇듯, 꽃이 피는 시기를 맞이하기까지는 다른 계절을 묵묵히 건너야 한다. 헬레보루스도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며 눈에 띄지 않는 시간 동안 조용히 힘을 모은다. 그리고 한겨울이 되어서야 자기 차례처럼 피어나는 꽃이다. 계절을 온전히 통과한 뒤 겨울에 만나는 꽃은 더 단단해 보인다.
가장 추운 시기에도 피어날 준비를 마치는 헬레보루스. 요란하게 봄을 알리는 꽃은 아니지만, 묵직하게 그리고 조용히 자기 차례를 맞이하는 모습이 좋다. 나도 올해는 무언가를 급하게 피워내기보다, 시간을 통과하며 힘을 모으는 시간을 믿어보고 싶다.
Hellebore: The History of a Toxic Medicinal ‘Remedy’그리스 의학의 기원에 나타난 약리학과 정신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