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수록 무거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_골드, 욕망과 삶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 조선일보 : 금 모으기 운동 ]


요즘 금값이 미친 듯이 오르고 있다.
예물 반지부터 아이의 돌반지까지,
예의를 갖춘 선물의 의미와 변치 않는 빛나고 귀한 삶을 상징하던 가치의 금이
이제는 상징적 가치보다 실질적 계산기를 먼저 두드리는 존재가 됐다.


금값이 오를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IMF 시절, 온 나라가 함께했던 금 모으기 운동.
우리 부모님도 그때 집에 있던 금을 거의 모두 내놓았다.

그 당시엔 어려서 그저 ‘금은 귀한 거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어 다시 떠올려보면 그 선택이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그 금이 얼마나 귀한 ‘황금’ 었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골드’라는 색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

변치 않는 골드 컬러는 사람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들어왔다.
누군가는 금빛 트로피 앞에서 환호하고, 누군가는 돌반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골드에는 인간의 가장 솔직한 욕망과 끝내 내려놓지 못한 불안이 함께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 헨드릭 드 클레르크_미다스의 심판_1620년경 ]




그러나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골드가 언제나 축복만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골드는 인류에게 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얼마나 더 가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충분할 때 멈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 왕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음식도, 물도,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것이 차갑고 무거운 금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딸마저 금으로 변했을 때, 그는 자신이 손에 넣은 것이 부가 아니라 고립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골드는 축복이 될 수 있지만, 한계를 넘는 순간 가장 잔인한 저주로 바뀝니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족되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을 무너뜨립니다.



[ (좌) 미이라 1편 속 장면 (우)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 ]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 역시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약속하지만, 소유자의 의지를 서서히 잠식합니다. 더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점점 더 자유를 잃고 결국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됩니다.

영화〈미이라〉속에서도 유적에서 탈출하던 하인 한 명은 이미 충분한 황금 장신구를 품에 넣고도, 끝내 더 많은 금을 챙기려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는 저주를 받은 것도, 누군가의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욕망을 내려놓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순간 골드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탈출을 방해하는 짐이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금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을 내려놓을 용기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드러납니다.

골드는 이렇게 인간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한계를 넘는 순간 가장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골드가 아니라, 그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좌) 구스타프 클림트_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_1903년부터 1907년 사이 (우)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



예술 속 골드는 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골드를 가장 관능적으로 사용한 인물입니다. 그의 ‘황금기’ 작품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에는 실제 금박이 사용되었습니다. 인물의 몸은 거의 사라지고, 얼굴만이 금빛 패턴 위에 떠 있는 듯 보입니다. 아델레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의 여성이었으며, 이 초상화는 권력과 부,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의뢰작이었습니다.

클림트는 그녀를 한 인간이자, 동시에 숭배의 대상에 가까운 아이콘으로 만듭니다. 이 그림에서 골드는 보고 싶게 만들지만, 만질 수는 없게 만드는 색입니다.

반대로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에서 골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 성화의 금빛 배경은 하늘과 신, 영원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원근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이 공간에서 금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금빛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성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입니다.

같은 골드이지만, 클림트의 금이 욕망을 신성하게 포장했다면, 안젤리코의 금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습니다.


[ 국보(119호)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금을 입힌 서 있는 부처, 539년 고구려 ]


반면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금은 소유의 대상이기보다 도달해야 할 상태에 가깝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금신(金身, Golden Body/Golden-hued body)은 황금으로 만든 몸을 뜻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존재의 몸, 번뇌에 흔들리지 않고 욕망에 부식되지 않는 마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정과 무구(無垢): 변하지 않는 금의 성질은 모든 번뇌를 끊어낸 청정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수행의 공덕: 부처님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오랜 수행을 통해 쌓은 선업(善業)의 결과물입니다.

진리의 빛: 이 빛은 지혜와 깨달음, 그리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의 의지를 의미합니다.


『열반경』에서는 이를 금강신(金剛身)이라 부르며, 여래의 몸은 썩지 않고 영원히 머무르는 진리의 몸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불교에서의 금은 밖에서 구하는 보석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안에서 벼려내야 할 마음의 단단함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집착해 온 ‘골드’의 의미가 새롭게 보입니다.

우리가 얻고 싶었던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과 확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불교의 금신이 더 많이 쌓아 올린 결과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끝에 드러나는 경지인 것처럼, 진정한 견고함은 소유가 아닌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금값 상승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 ‘골드’는
나를 지켜주는 것인지,
아니면 불안을 덮기 위해 쥐고 있는 가장 익숙한 위안인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이미 충분한 것을 덜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골드는 본래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졌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따라 온도는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게는 탐닉의 대상이고, 누군가에게는 경외의 대상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완성된 인격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골드는 더 많이 쌓아 올릴 수 있는 물질입니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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