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오명,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색일까?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출처: 구글 재미나이]


기업 인문학 강연이 있던 날,
나는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블랙 슬랙스를 매치해 강단에 올랐다.

강연에 오신 많은 분들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동시에 의외의 반응도 있었다.
블랙과 옐로우의 대비로 좀 과해 보인다거나,

택시 기사님 유니폼을 떠올렸다는 말도 들었다.


며칠 후, 같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다시 입었다.
이번에는 하의를 블랙 대신 회색을 선택했다.
그날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상의는 분명 같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었지만,

사람들은 세련돼 보인다고 했고, 센스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회색은

다른 색이 지나치게 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색이라는 걸.



[출처: 불교닷컴]


회색이 지닌 균형의 의미는 불교 수행자의 옷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스님들의 옷이 회색 계열인 이유는 단순한 전통이나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회색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색입니다. 드러나지 않겠다는 태도, 비집착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불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중도는 지나침과 모자람,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하는 길이며, 회색은 흑과 백 사이에서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잠시 내려놓게 하는 색입니다.


회색은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시선이 머무를 지점을 줄임으로써, 마음이 외부로 흩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회색은 수행의 과정에서 외부보다 내부에 집중하도록 돕는 색이 됩니다.

바위, 흙, 안개, 새벽의 산처럼 회색은 배경으로 인식되는 색에 가깝습니다. 눈에 띄기보다 공간의 분위기를 정리하고, 시선의 흐름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사찰에 들어서면 특정 대상보다, 공간 전체의 고요와 분위기가 먼저 감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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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피터르 브뤼헐,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565 우: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회색은 색을 덜어낸 상태에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색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강렬한 색채를 올리기 전에 의도적으로 회색의 밑그림을 먼저 사용했습니다.
이를 그리자유(grisaille) 기법이라 부르며, 형태와 구조, 명암과 균형을 먼저 정리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피카소의〈게르니카〉는 회색과 검정, 흰색만을 사용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합니다. 작품의 제목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민간인 거주지였던 바스크 지방의 한 마을 이름으로, 무차별 폭격의 현장이었습니다.

피와 불, 슬픔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색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관객은 특정 감정에 유도되기보다 폭력 그 자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회색은 사건을 해석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제시하는 색입니다. 색을 제거했기에 감정은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전달됩니다. 이처럼 예술사에서 회색은 감정을 줄이는 색이 아니라, 감정의 본질에 더 깊이 도달하게 만드는 색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출처 : 언플래쉬]


“회색이 좋아지면 스트레스가 높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부 색채심리 연구에서는 우울감이나 불안 수준이 높은 집단에서
무채색, 특히 회색 계열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회색이 좋아진다는 건 무조건 상태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의 자극을 줄이고 싶다는 신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한 색을 감당할 여력이 부족할 때,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극이 적은 색을 찾게 되고, 회색은 그렇게 과열된 감정을 식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좋아지기도 합니다.




[출처: 언플래쉬]


블랙을 하기엔 너무 어둡고 화이트를 하기엔 너무 밝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중간.

뭔가 애매하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며, 판단을 유보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회색은 오랫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를 함께 가져왔습니다.

회색분자, 박쥐 같은 인간이라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레이의 어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gray’ 또는 ‘grey’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 grǣg에서 유래했으며,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색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합니다.

정의 자체가 이미 ‘중간’에 놓여 있기 때문에, 회색은 명확하지 않다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gray area’라는 표현은 흑백처럼 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영역을 의미하게 되었고, 흑백논리가 강한 사회일수록 회색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오해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대부분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명확한 정답이 아닌, 여러 조건 속에서 가능한 최선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회색은 그런 삶의 방식과 가장 닮아 있는 색입니다.






회색은 결정을 미루는 색이 아닙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는 색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은회색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 눈은 감정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는 시선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분명한 정답 앞에 서기보다,
여러 조건과 관계, 감정과 책임 사이에서
그 순간에 가능한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길은

흑과 백, 두 가지뿐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방향에서

두 갈래로 보일 뿐,

시선을 넓히면 선택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회색은 두길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고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쉼표와도 같습니다.


요즘 당신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색은 무엇인가요.?


만약 회색이 유난히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지금의 당신이
균형과 안정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이지 않을까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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