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속 나의 위장색과 정체성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출처 : 연합뉴스 ]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찍은 유튜브 영상을 흥미롭게 봤다.
지하철 안과 거리의 풍경을 비추며

“왜 이렇게 다 검은색이 많아요?”
“마치 단체복 같아요.”

가볍게 웃고 넘길 말이지만, 곰곰이 떠올려 보면 낯설지 않다.


특히 남성 비율이 높은 강의를 하러 가면

검정, 회색, 네이비를 입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조금 과감한 색이라면 버건디 정도일까?


“왜 그 색을 입으세요?”


대답은 대개 비슷합니다.
“튀지 않아서 좋아요.”


튀지 않는 색.
눈에 띄지 않는 색.


우리는 언제부터 ‘드러나지 않음’을 편안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평가 불안(Social Evaluation Anxiety)’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튀지 않는 색은 괜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선택입니다.

블랙과 그레이는 세련된 색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색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받는 순간, 괜히 눈에 띄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색은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이면서,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도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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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unsplash ]



자연은 오래전부터 이 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막여우의 털은 모래와 매우 비슷한 색을 띱니다. 이는 사막 환경에서 포식자의 눈에 덜 띄도록 진화해 생존 확률을 높이는 전략입니다.
북극곰의 털은 흰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투명에 가깝습니다. 털 속의 공기층이 빛을 산란시켜 눈과 비슷한 색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구조입니다. 설원에서의 몸의 윤곽이 흐려지고, 사냥과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카멜레온은 주변 색을 그대로 따라 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2015년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감정 상태와 사회적 신호, 스트레스 반응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단순한 배경모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능동적 반응입니다.

위장색은 드러냄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자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인간 역시 필요에 따라 색을 바꾸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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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ister Crew_(좌) 19세기 영국군 붉은제복, 출처: Wikipedia_(중) 영국군 카키제복, (우) 다즐패턴을 입힌 군 ]




위장색이 체계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전쟁이었습니다.

19세기 영국군은 붉은 제복을 착용했습니다.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는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과 장거리 전투 환경에서 붉은색은 너무 눈에 잘 띠어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멀리서도 쉽게 식별되는 색은 곧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채택된 색이 카키(Khaki)였습니다. 힌디어로 ‘먼지’를 뜻하는 이 색은 주변 환경에 스며들기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위장색이 더욱 발전합니다. 1917년, 영국 해군 예비군 장교이자 예술가였던 노먼 윌킨슨(Norman Wilkinson)은 ‘다즐 카모플라주(Dazzle Camouflage)’를 고안합니다.

‘다즐(Dazzle)’은 ‘눈을 어지럽히다, 현혹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 위장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 보이게 만드는 전략이었습니다.

선체를 검정·흰색·청색 등의 강한 기하학적 무늬를 사용해 함선의 윤곽과 방향을 왜곡했습니다. 목적은 배를 감추는 것이 아닌, 적이 거리와 속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Behrens, Camouflage, 1989)

권위를 과시하던 색은 전쟁을 거치며 기능의 색으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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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Carl Gustav Jung (우) 페르소나 마스크 ]



위장색은 자연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인간의 심리에서도 사용됩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페르소나(Persona)’를 사용한다고 말했습니다.
페르소나는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며,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회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Jung, The Archetypes and the Collective Unconscious, 1959)

융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거짓 자아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말투를 조절하고, 태도를 바꾸며, 외형을 관리합니다. 색 또한 선택 중 하나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네이비를, 권위가 필요한 순간에는 블랙을, 무난함이 요구되는 공간에서는 그레이를 선택합니다. 이는 상황에 맞춘 선택입니다.

융은 페르소나와 ‘자기(Self)’를 동일시할 때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가면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가 되는 순간 본래의 자아는 점차 희미해집니다.




익숙해지면

그 색이 정말 좋아서 입는 건지,

필요해서 입는 건지,
그저 습관이 된 건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관계 속에서 튀지 않기 위해,
조직 안에서 무난하기 위해,
괜한 평가의 중심에 서지 않기 위해.

선택했던 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색이 나의 취향인지, 습관인지 조금씩 흐려집니다.


나를 아는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색을 입고 있는지
왜 그 색을 입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일 아침, 옷장 문을 열 때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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