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한 장의 원피스 사진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영국의 한 드레스 브랜드에서 출시한 제품이었는데, 그 색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흰색 바탕에 금색 줄이라고 보았고,
다른 이는 파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제조사는 이 드레스가 파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로 제작되었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보였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까 궁금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넌 이거 무슨 색으로 보여?”
누군가는 흰색과 금색이라 했고,
어떤 이는 나처럼 파란색과 검은색이라고 답했다.
단순한 원피스 색 하나를 두고 의견은 팽팽히 갈렸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사실은,
두 입장 모두 자신이 본 색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아니야, 분명히 이 색이야.”
그 논쟁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서로 다르게 본 것뿐, 틀린 사람은 없었다.
그 차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시지각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현상은 ‘색 항상성(color constancy)’이라 불립니다. 우리의 뇌는 눈에 들어온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 대상이 어떤 조명 아래 놓여 있는지를 추정한 뒤, 색을 스스로 보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푸른 그림자 속에 놓인 드레스로 인식했고, 어떤 사람은 따뜻한 실내조명 아래의 색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이미지를 보았지만, 뇌가 가정한 ‘빛의 조건’이 달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색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대상을 보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눈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읽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빨갛고 둥근 물체를 멀리서 본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색과 모양일 뿐입니다. 여기에 조건을 더해보죠. 평생을 과수원에서 살아온 사람과 평생을 당구공을 만들어온 사람이 그 물체를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요. 같은 정보를 보더라도 한 사람은 ‘사과’를 다른 사람은 ‘빨간 당구공’을 먼저 떠올릴 가능성이 큽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같을지 몰라도, 의미는 각자의 경험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계단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선과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할 공간’으로 이해합니다. 보는 순간, 이미 해석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본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의 용도와 의미를 경험적 지식으로 덧붙입니다.
이처럼 ‘본다는 것’은 눈에 들어온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각자가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그 해석이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항상 열려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질문해 온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오래전부터 착시를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끌로드 모네(Claude Monet)는 색이 하나로 정해져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과를 빨간색으로 칠하지 않았고, 성당을 하나의 색으로만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같은 건물을 여러 번 그리며, 아침과 저녁, 흐린 날과 맑은 날의 색 차이를 기록했습니다. 빛과 시간의, 조건이 달라지면 색도 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판화가 M. C. Escher의 작품 〈Relativity〉에서는 계단이 동시에 위로 오르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지만, 우리는 그림을 보는 순간 하나의 구조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모순된 구조도 스스로 정리해 이해하려 합니다.
옵아트의 대표 작가 Victor Vasarely는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만으로 화면이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냅습니다. 평면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움직임과 깊이를 느낍니다. 단순한 선과 색의 배열만으로도 감각이 쉽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세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을 사용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색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공간은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으며, 감각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는 세계는 실제 대상이라기보다, 조건과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착시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착시 속에서 살아갑니다. 같은 말을 듣고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누군가는 농담으로 넘깁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이해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회의 자리에서 발표를 하는데 상사가 아무 말 없이 메모만 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잘못했나?”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집중해서 듣고 있구나”라고 받아들입니다.
상황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만들어집니다.
빛의 조건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듯, 우리의 판단 역시 배경과 경험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하는 생각은 얼마나 객관적일까요.
혹시 우리는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이 덧입혀진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늘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빛이 달라지면 색이 달라 보이듯, 경험이 다르면 의미도 달라집니다.
색의 착시는 단순한 시각 현상을 넘어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같은 장면도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그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조건의 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같은 상황을 겪어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합니다.
경험과 맥락이 다르면 이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갈등은 다름 때문이 아니라,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이 판단도
내 입장에서 그렇게 보였을 뿐은 아닐까요?
그리고 상대의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이고 있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