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빨간색이요.”
“초록색도 있죠.”
“검붉은 색도 있어요.”
그때 저는 하나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햇빛을 받은 사과,
그늘에 놓인 사과,
벌레 먹은 사과,
반쯤 썩은 사과,
덜 익어 노르스름한 사과.
같은 사과인데 색은 모두 다릅니다.
“사과는 사과색입니다.”
사과에는 하나의 정답 색이 없습니다.
빛에 따라 달라지고, 상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과는 빨강’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 걸까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색을 자연이나 사물에 빗대어 배워왔습니다.
개나리색, 귤색, 하늘색, 살색...
노란색을 떠올릴 때 개나리나 병아리를 생각했고, 주황색을 말할 때 귤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색은 어떤 이미지와 함께 기억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물이나 자연의 이름을 빌려 부르는 방식을 관용색명이라고 합니다.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이지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색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색상·명도·채도를 기준으로 색을 구분하는 방식을 계통색명이라고 하며, 먼셀 표기법이 그 한 예입니다. 같은 색을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색을 배우기 전에 이미 익숙한 이미지와 함께 색을 기억해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런 방식이 더 쉽고, 더 빠르고, 무엇보다 기억하기 편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개나리를 떠올리면 노랑이 바로 떠오르고, 하늘을 생각하면 파랑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니까요.
그런데 이 ‘익숙함’은 어느 순간 기준이 되고, 기준은 당연함이 됩니다
한때 크레파스에는 ‘살색’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가장 익숙한 색이 자연스럽게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피부색은 하나가 아니라는 문제 제기 이후 그 이름은 ‘살구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의 색을 기준처럼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자연스럽다고 여겨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색을 직접 관찰하기 전에 ‘바나나는 노랑, 포도는 보라’처럼
외워서 기억하는 방식으로 색을 배운 것은 아닐까요.?
폴 세잔은 사과를 그릴 때 사과를 “빨강”이라고 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사과와 앵초가 있는 정물]을 보면, 사과에는 녹색이 섞여 있고, 갈색이 겹쳐 있으며, 그림자 부분에는 푸른색이 들어가 있습니다. 세잔은 기억 속 색이 아닌, 눈에 보이는 색을 관찰했습니다.
끌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1890–1891)에서 같은 건초더미를 여러 시간대에 그렸습니다. 건초더미는 보통 노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네의 그림 속 건초는 보랏빛이 돌기도 하고, 푸르게 보이기도 하며, 해 질 녘에는 붉게 물듭니다.
1905년,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작품이 처음 파리 살롱 도톤느에 전시되었을 때 일부 관객과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조롱했습니다. 인물의 얼굴에 초록과 분홍, 보라 같은 색이 과감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굴은 ‘살색’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관습적인 피부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면 안에서 색이 서로 어떻게 어울리고 대비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세 화가는 공통적으로 ‘원래 그렇다’는 기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직접 보고,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색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사과는 빨강.
하늘은 파랑.
저 사람은 차가운 사람.
나는 이런 사람.
그러나 그 ‘원래’는 사실이라기보다 오래 반복된 익숙함일지도 모릅니다.
색을 단정하는 습관은 사람을 단정하는 습관과 닮아 있습니다.
한 번 붙여진 이름은 오래 남고, 반복된 이미지는 어느새 진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나 자신도 쉽게 단정 지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