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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Nov 13. 2019

내가 그렇게 예쁜가?

고백해서 혼내준다

"지금까지 자신감 하나는 최고인 나였는데, 그 순간 깨달았다. 좋아하는 그녀 앞에서 난 겁쟁이였다."


"사랑은 할듯말듯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네가 오래도록 날 좋아하게 두고 싶었어."


영화 <그 시절, 우리들이 좋아했던 소녀>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소년 커징텅은  학창시절에 만난 소녀 션자이를 오랫동안 사랑하지만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고, 그녀 역시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이들과 비슷한 부류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 서연도 있다. 승민은 대학에서 만난 서연을 오랫동안 좋아하지만, 그걸 말하기가 그렇게 어렵다. 서연도 분명 승민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끝내 승민은 고백을 하지 못했고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만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말로, 사랑고백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랑의 감정이 클수록 더 그런것일 거라고 감히 단언해본다.


대만 국민첫사랑 션자이도, 대한민국 국민첫사랑 수지도, 결코 쉽게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고백을 쉽게 받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카페알바들이다. 카페 뿐이 아니라, 서비스직 알바에 종사하다보면 누군가로부터 고백을 받아 난감한 경험을 심심찮게 겪게 된다고 한다.


물론, 나름대로는 그 고백도 쉬운 것만은 아닌 경우도 있나보다. 나는 카페에서 알바하는 동안 진상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풀기가 미안해 진상썰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며 공감을 얻으며 푸는 경우가 많았다. 진상썰들만큼이나, 짝사랑하는 알바에게 고백을 해도 될지와 그 방법을 묻는 글들도 많이 검색됐다.


카페알바를 좋아한다는 커뮤니티고민글에는 나름의 조언들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정그러면 주문할때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줘라>


<아니다 그걸보고 연락할 여자가 어디있냐 차라리 바로 번호를 물어봐라>


이런 저런 방법들이 논의(!)되는 가운데 누군가의 댓글이 그 모든 논쟁을 깨끗하게 정리하는듯한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지좀마세요. 제가 개인카페 운영하는데, 자꾸 손님들이 고백해서 일잘하던 여자알바들이 계속 그만둡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의 저같은 댓글이 아니더라도, 머리로는 알바에게 고백하는 게 그들을 곤욕스럽게 하는 거라는 것을 다들 아는지, 알바들에게 고백하는 글들 밑으로는, '고백해서 혼내준다'는 말들이 유행처럼 주르륵 달려있었다. 이것은 사실 남초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이 스스로를 '여자에게 인기없는 존재'로 자조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고백이 알바를 괴롭히는(=혼내주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스스로도 '고백해서혼내준다'고 하면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차일 것임을 알고 자조하면서도 고백을 한다는 것. 다시말해 저 유행어는 알바를 향한 그 고백이라는 행위자체가 결코 진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지하지 않은 고백을 '진짜' 사랑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에 연애에 대한 명언이 적힌 블로그에서 '고백은 선언이 아니라 확인이다' 라는 문장을 본적이 있는데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될 것 같을 때, 상대의 마음도 나와 같은 것 같을 때, 너와 내가 모두 연애할 준비가 된 것 같을 때 고백을 하는게 일반적이다.


-왜 알바에게 고백하는 일은 흔할까?


오마이뉴스의 박정훈 기자가 쓴 에세이 <친절하게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남자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기사에 나온 프렌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매니저에 따르면 가장 심한 진상은 고백하는 손님이며, 심지어 한번 고백한 손님이 계속 찾아와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다 고 한다. 육개월 동안 한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고백받았다는 커피 전문점 알바는 기러기아빠의 고백을 받거나, 고백한답시고 시를 써 온 뒤 계산대 앞에서 읊던 사람에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또래에게 고백받은 적은 한 번 뿐이었다고 전한다. 나머지는 다 아저씨라는 것이다.>


어떤 고백은 폭력이 된다.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번 방문하며, 주문을 하고 커피를 받을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저씨' 고객이 있었다. 그와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딸도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외국에 있는 우리 커피프렌차이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다 큰 딸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자신의딸 이야기까지 꺼내는 그 고객을 그냥 상냥하고 넉살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서비스직에 입문하면서 나만의 버디고객을 만들 것을 목표로 했었기에, 먼저 친절하게 좋은 말을 해주는 젠틀한 그 고객을 살갑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느날 그가 주문을 하면서 명함을 줬다. 연락을 하라고 했다. 명함을 슬쩍 보니 그는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을듯한 유명한 회사의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다. 명함은 받지 않는다고 하자 그가 엄청난 무안함을 느낀 얼굴로 화를 버럭냈다. 그동안 종종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그에게 갑자기 얼굴을 바꾸기도 뻘쭘했던 내가 웃으며 죄송하다고 말하자 그는 역정을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왜 자꾸 웃어요? "


우리 매장은 아주 바빴고, 점장이 파트너 하나하나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서 있는 구조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이 일을 아무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곤란해서 일을 그만둬야 한다거나 하는 지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그 다음부터 우리 매장에 더 이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일이 폭력으로까지 다가왔다고 느낄 여지는 적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여지를 준 것도 아닌데, 그와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내가 다 큰 딸이 있는 유부남에게 다짜고짜 연락하라는 말을 듣는 경험은 분명히 매. 우. 불쾌했다.


-웃지 않으면 어떨까?


나는 웃지 않으면 차가운 얼굴이다. 웃어야 인상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알바를 할 때, 내가 무표정으로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고객들이 있었을 거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아닌 한, 웃고만 있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날도 진상을 한무더기로 만났고, 또 진상의 기운을 풍기며 이를 쑤시며 다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마주쳐오는 고객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그런 종류의 판단이 아니라, 앞에 서 있는 나를 일단 사람으로 안보기에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마주치자마자 진상의 스멜을 느끼고, 그 예감은 백퍼 적중했었다. 그 고객을 보고 나는 그저 무표정하게 주문을 받으려 했는데, 그가 다짜고짜 발을 구르며 말했다.


"왜 안웃어?"


한숨이 나왔지만 논쟁이 더 귀찮을 거라 생각한 내가 슬며시 웃으며 "죄송해요. 피곤해서 멍때리고 있었어요." 같은 말을 하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웃어야 내가 비싼 거를 주문하지."


(심지어 나는 아가씨도 아니고 곧 마흔이다. 그들은 알바가 어떻게 생겼는지, 몇살인지, 그런건 중요치도 않은듯했다.)


그런가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파트너 중에 안경을 낀 사람이 있었다. 그 파트너와 나는 성격이 잘 맞는 편이어서 같이 근무조가 되었을 때는 대화도 많이 하고 즐거웠었다. 그런데 말을 할 정신도 없게 바빴던 어느 날, 유난히 진상이 많다고 느꼈던 날이었다. 한 할아버지가 그녀의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보더니 그녀의 영어닉네임을 되뇌이며 피식거렸다. 그러더니 주문을 해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oo은 서비스직에서 일하려면 안경을 벗는게 예쁘겠다"는 말을 건넸다. 희롱이다.


나도 비슷한 경우를 자주 겪었다. "드시고 가세요?" 라고 묻는 질문에 "그걸 왜 물어봐요? 드시고 갈거면 같이 마셔주게요?" 같은 식으로 응수하는 건 예사다. 궁금하지 않은 얼평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받았던 그런 정도의 ‘가벼운’ 성희롱은 알바의입장이 아니어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자주 들었던 것들이다. 직장 상사나 일하면서 만났던 ‘노오오오오옾으신 분들’에게서 더한 취급을 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나의 상사이거나, 나에게 갑질을 해도 될만(하다고 본인은 생각하는)하거나 하는 경우, 다시 말해 뭐가 됐든 우리들 사이의 사회적관계라는 게 존재하는 사이였다.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공장소인 카페에서, 생판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휘두르는 폭력과는 성격이 다르다.


내가 들었던 수많은 ’불쾌하게 느껴지는 고백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다. 카페 앞에서 기다렸다가 자신이 나를 먹여살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는 거까지만 밝혀둔다. (알바를 하면 이거 아니면 먹고살수가 없는 형편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봐도 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추근거림과 진짜 마음고백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어리지 않다. 그런 고백을 들었을때 드는 생각이 ‘내가 그렇게 예쁜가’가 아닌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인 건 당연한 일이다.


알바로 일하던 도중에 어떤 모임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모임에 나온 지인이-그는 돌싱이었다. 유부남은 아니라 다행인가-마침 잘왔다고 친한척을 하며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했다. 고민의 내용은 이랬다. 자기 회사 근처 꽃집 아가씨가 자기만 보면 생글생글 웃는다고.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거였다.


“뭘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나도 요즘 서비스직에 종사하니까 그런심리를 좀 알지 않냐며. 보기만 하면 미소가 나오는 고객이 있지 않냐고. 그런건 어떤 심리냐고.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웃으면 욕해서요”


물론 누군가는 카페알바에게 진심일 수 있단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왜 안웃어줘?”라고 강요받고, 웃으면 “왜웃어요?”라고 항의받는 경우. 알바를 하는 게 아니면 어지간하면 당하기 힘든 경우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죄냐고, 어떤 이는 진심이라고, 예민하다고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고백들이 다 진심이라면 나는 수지보다 예쁘다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어떤 고백은 분명히 그 자체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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