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조각들
요즘 들어 한 가지씩 자주 잊어버린다. 오늘은 어젯밤 책상에 던져 놓은 교통카드를, 어제는 도서관에서 빌려 놓고 전시만 해둔 책의 반납 기한을, 또 그 전날에는 신발장 앞에 묶어 놓은 쓰레기봉투를 잊어버렸다. 아차차 깜빡했다 하며 내일 또 내일모레 챙겨야 할 일들이 쌓여간다. 항상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놓치게 된다. 영민함, 기민함 같은 분명하고 뾰족한 것들이 사라지고 여기저기 틈이 생겼다. 이런 게 노화인가.
나 요즘 이상한 것 같아.
자꾸 뭘 잊어버리고 생각이랑 말이 다르게 나와. 뭔가 좀 이상해.
아냐. 흘러가는 중이야, 세월에 둥실둥실.
J의 말처럼 나는 요즘 분명 두 다리로 서있는데도 둥실둥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둥실둥실 떠있는 것 같다. J는 내가 어떤 실없는 소리를 해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M은 요즘 유행한다는 두뇌 운동 게임 링크를 보내왔다. ‘인싸게임’이라고 강조하면서. 나는 ‘유행의 사망 선고’라는 말을 떠올리며 우리가 알면 유행은 이미 지난 거라 답하려다 말았다.
뇌운동을 해줘.
Y가 말한다.
얼마 전 Y를 만나 우리의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했다. Y는 주변에서 동안이라고 할 때마다 외모만이 아니라 행동과 말투가 어려 보인다는 뜻으로 들려서 이제는 칭찬 같지 않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때때로 생기는 변수에도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늘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의 말속에 숨은 가시를 발견하거나 무리한 부탁을 예의 있게 거절해야 할 때,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관망의 태도가 최선인 것처럼 포장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이럴 때마다 조선시대 노비 마냥 이마에 ‘당황’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차라리 누군가 내 몸을 밧줄로 묶어 억지로라도 답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일찍 철들어 ‘애어른 같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내가 남들보다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 노련함 같은 어른스러운 것들을 이미 다 써버린 것이 아닐까.
지난 독서 모임에서는 ‘어른’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아주 먼 미래에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A는 긴 생머리를 가진 할머니가, B는 옷을 잘 입는 할머니가, 남자인 C는 머리숱이 풍부한 할아버지가,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덧붙이자면 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길 소망한다. 할머니 같지 않아서 ‘아이처럼 귀엽다’가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로 귀여운 할머니,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2024.1.14.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