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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는 지은이 Sep 13. 2020

“너희는 어차피 기득권층이 될 꺼야, 그러니까…”

나의 첫 대면수업, 수의해부학 실습

2020년 9월 7일 월요일 1시. 날씨 화창.

올해의, 아니 입학 후 나의 첫 대면수업. 60여명의 과 동기는 3조로 나누어졌고 한 번에 한 조씩 강의실에 들어갔다. 마스크를 끼고 띄엄띄엄 앉아 교수님을 기다렸다. 교수님은 개뼈가 담긴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들어왔다. 교수님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1학기는 전과목 온라인 수업이었으므로 기말고사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실물’ 교수님을 보았다. 시험 5분 전이었다. “시험 다 맞히는 사람은 F 줄꺼야.” 와르르 아이들이 웃었다. 교수님 왈, 다 맞추는 건 출제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 떠올라 한동안 웃음이 맴돌았었다. 그런 F라면 한번은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근사한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니!하는 감탄도 들고. 결국 F는 못 받았지만 말이다.


너희들은 사회 나가면 어차피 기득권층이 될꺼야.
그러니까 다 잘 하려고 하고, 다 가지려고 하면 안돼.
적당히 하고, 덜 가지고, 늘 양보해야 된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면 사회가 망가져

해부학실습 첫 강의를 교수님은 이렇게 시작했다. 기득권, 양보라는 단어가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아 그렇지. 수의대 본과 1학년 강의실. 여기 모인 친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나중에 사회에서 어떤 세력이 될지.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너는 왜 의대 왔어?” “엄마가 가라고 해서요.”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이다. 극중 정준호가 인턴들에게 왜 의대에 왔는지 묻자, 그 중 하나 대답한다. “엄마가 가라고 해서요.” 저런 아이들이 잔뜩 있을 의대라니, 병원이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이번 의사파업을 보면서 그 때 그 아찔한 상상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팽개친 것도 놀랍지만, 북한 파견 운운하는 가짜 뉴스를 철썩 같이 믿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생명을 다루는 자가 가져야 할 사명감은 고사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현실인식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바보일 리 없다. 아마도 유튜브의 놀라운 알고리즘 덕분에 그리고 의사/의대생들의 카톡방과 밴드를 돌고 도는 정보 덕분에 가짜 정보는 어느새 가짜일 리 없는 정보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더 깊지 않을까? 몇일 몇주만에 만들어진 가짜 정보를 믿게 만드는 인식의 지반, 그들의 권리는 정부라도 침해할 수 없다는 생각의 토대 말이다.



우리의 인식이 문제의 뿌리라면


‘공부 잘 하면 의대’ (또는 법대)라는 공식. 누군가 의대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그 친구 공부 잘했나보네.’라는 말. 애초에 의사라는 직업과 사명감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의사는 공부를 잘 해서 얻어낸 타이틀이다. 그들이 노력으로 얻은 타이틀인 만큼(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렇다 치자),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누려 마땅한 것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럴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환자나 국민, 정부가 침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의 고귀함이나 의사의 사명감, 이런 건 책이나 영화에나 있는 것 아니던가. 우리의 현실에는 ‘공부 잘 하는 사람’, ‘의대/의사’, ‘경제적 사회적 성공’ 이것들의 등가만 있을 뿐이다. 이 등가를 깨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고 ‘권리’만을 외치고 ‘권력’을 휘두르는 의사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또다른 그들도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19를 함께 겪어낸/겪어내고 있는 의사들을 안다. 자신의 병원을 닫고 대구로 내려갔던 의사들(그리고 간호사들). 탈수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병상을 지킨 사람들. 우리가 고마워하고 격려하고 응원하고 걱정했던 그들. ‘존경’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그야말로 ‘덕분에’ 우리가 무사히 지났던 하루하루들. 그들과 우리가 서로 힘이 되던 경험. 이 경험 속에서 의사를 꿈꾸게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도 나중에 의사가 되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겠지.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의사가 된 이들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세월호가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19의 경험과 기억이 우리를 성장시켜주길.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존재와 가치를 환기하고 각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어떻게 들어왔어도 나갈 때는 같은 마음이길


모두가 ‘생명을 살리겠다’는 소명으로 수의대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가능하다. 성적이 맞아서 온 사람, 막연히 동물이 좋아서 온 사람, 엄마가 가라고 해서 온 사람, 유망 직종이라고 해서 온 사람, 전문직이라서 온 사람…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 강의실에 있다. 앞으로 4년 동안 같은 것을 배우고 비슷한 경험을 쌓으며 조금씩 수의사가 되어가겠지. 들어올 때 어떤 생각이었든 졸업할 때는 ‘다 잘 하려 하지 말고, 다 가지려 하지 말고, 늘 양보하는’ 사람들이길. 그것이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공통점이길 바란다.


Ps. ‘다 잘 하려 하지 말고’에서 자꾸 ‘아 이건 좀?’ 하는 마음이 들지만… 행간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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