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를 만나다 中
섭지코지를 등에 지고 남서쪽으로 속도를 냈다. 이제 운전이 좀 편해지기 시작했고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익숙한 1132 도로에 접어들었다. 무려 시속 80km까지 내달릴 수 있지만, 간간히 거친 노면과 어린이나 노인 보호구역들을 핑계 삼아 안전한 속도를 유지하며 한참을 달렸다. 3일 차 숙소를 예약할 때 이동거리를 두고 망설였다. 한 번에 내달리기엔 좀 먼 길이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선택했던 이유는 내가 항상 제주를 왔을 때면 들렀던 표선의 검은 바다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비치리조트를 지나 표선 해변을 끼고 돌아가는 올레 4코스를 혼자 가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구불거리는 해안도로를 한참 삐걱거리며 돌아들어가는 게, 이날의 백미였다. 아스라이 스쳐가는 반대편 차선의 사이드미러가 나의 오금을 저리게 했지만. 그 역시도 계산된 스릴이었다.
그렇게 온 신경을 바짝 세우며 도착한 곳, 와하하 게스트하우스는 넓은 잔디밭과 마주한 바다 호수가 인상적이었다. 해안가 검은 돌이 만든 자연적인 바다 호수와 돌 틈 고동들을 먹으려는 이름 모를 새들이 장관을 이뤘다. 잔디밭에는 아기자기한 테이블과 해먹들이 자리해 해질 무렵 여행의 피로와 그간의 고단함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기설기 단단한 굵은 면사로 직조된 해먹은 햇볕에 그을려 더욱 멋스러웠고, 누웠을 때 한 여름에도 끈적이지 않고 까슬거렸다. 나는 해먹 위에서 가져간 여행 에세이들을 읽으며 또 한 번 여행을 떠났다.
해가 지고, 모기들이 달라 들 때쯤, 게하에 있던 자판기에서 평소에 즐겨 먹던 새우탕과 음료수 한 캔을 뽑아 들고, 동굴 같던 침대로 들어갔다. 다른 게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조로 넓은 방에 2층 침대 여러 개가 벽을 둘러싸고 있었고, 각 침대마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이 닫혀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고, 커튼이 열려 있다면 오늘 밤 주인 없는 침대라는 표시였다. 그 와중에 한적해 보이는 곳을 찾으려다 금세 포기하고,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을 구석 2층에 자리 잡았다. 커튼까지 치고 나면 어디서도 나를 볼 수 없는 그 옛날 창문 없는 고시원 같았다. 더위가 한창일 때여서 에어컨의 찬 공기는 암막 커튼에 막혀 제 기능을 못했고, 가끔 암막을 걷었다 쳤다를 반복하며 밤을 보내야 했다. 혹시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거기 그 침대를 추천한다. 이왕이면 겨울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