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를 만나다 中
아침 6시, 내 다리와 팔에 매달려 잠든 아이들이 깰까 싶어 도둑처럼 살금살금 화장실로 향했다.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화장실에서 출근 준비를 했다. 적당히 말린 머리에 적당히 화장을 하고 건조대에서 적당히 마른 옷을 꺼내 입고서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시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출근을 서둘렀다.
큰 도로 버스정류장까지 도보 5분, 버스를 타고 상록수역까지 15분, 지하철을 타고 사당까지 45분, 사당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신림까지 15분, 내려서 도보 5분,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내려서 도보 5분… 그렇게 정신이 없는 출근을 마치고 계속 이어지는 회의…. 그렇게 다시 퇴근을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가끔 꿈의 직장이란 타이틀로 뉴스 기사에 소개되었다. 과장님, 대리님이 아니고 서로의 이름에 '님'자를 붙여 서로를 존중했고, 야근보다는 칼퇴가 눈치 안 보이는 IT회사였다. 그 안에서 꽤나 인정받으며 일했고 자부심도 있었다. 퇴사하기 얼마 전에는 코스닥에 상장되어 더욱 괜찮은 회사가 되었다. 나 역시도 그 안에서 만족감을 가지고 일을 해왔고 일을 통해 성취감과 보람을 느껴왔다. 그러나 한 순간이었다.
늘 해왔던 일이 갑자기 만족스럽지 않았고, 뭔가 답답함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면 다시 직장을 다니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아휴직이 자유롭고, 야근이 적은 회사라서 결혼을 한 여성에서 매력적인 회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가 흔치 않다는 건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직장을 갖지 못한다 해도 내가 지금 이곳에서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심장에서부터의 압박이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출근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이 일어났다. 출근하자마자 인근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혈압이 심각하게 높은 것 외에는 심전도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혈압약을 받아 들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혈압약 먹어도 나아지질 않는 게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으로 보인다면서 신경안정제와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정신과 약을 처방해주었다.
혈압약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증상은 정신과 약을 먹으니 안정을 찾았고, 서른아홉 나는 그게 더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쉬자.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나. 그러나 서른아홉, 두 아이의 엄마, 모아지지 않는 돈,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쉬고 싶어도 쉽게 결론 내려지지 않을 거란 건 모두 알 것이다. 나 역시 약을 먹어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대로 좋은가. 이대로 계속 가도 되겠는가. 내가 멈추고 쉰다는 건 나의 경력을 멈추는 것뿐 아니라 더 이상 생계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과 어쩌면 영원히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렇기에 더 신중해야 했고, 그 고민에 매일 밤 뜬눈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밤낮으로 고민한 끝에 나는 이기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돈보다 소중한 내 아이들과 나의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남편에게 늘어놓았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이야기는 두서가 없었고 목소리는 떨렸다.
한참을 말없이 듣던 남편은 한 번도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불쾌하고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이었고, 그 낯선 모습에 내 맘은 먼저 무너졌다.
남편은 나한테만 책임지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말 한마디 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파서 그런다든가… 잠깐만 쉬고 아이가 더 크고 내가 나이가 더 들면 다시 돈을 벌거라든가… 나의 퇴직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떠들고 싶었지만. 나는 조용히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다. 더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고 여겼고, 지금 생각하니 그 생각은 옳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자기 나름의 청사진을 그려 보이며 내 결정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사람들은 뭐 그리 싱겁게 결론이 났나 싶을 거다. 유난히 말이 적은 데다 말주변도 없던 남편이 말 많고 논리적인 나와 대화를 통해 그 순간 결론을 종용받았다면, 아마 우리는 서로에게 무시무시한 상처만 가득 남기고 말았을 거다. 대화는 참 좋은 소통 수단이지만 때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결혼을 해서 첫 아이를 가진 뒤 유산을 했던 적이 있다. 혼자 찾은 산부인과에서 임신 4개월 차에 하는 입체 초음파를 찍는데 힘없이 늘어져 있는 배 속 아이가 보였다. 충격을 받은 나는 출근한 남편에게 연락해 놓고 길에서 한참을 울었다. 길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본 남편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내가 한없이 우는 모습을 보고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우는지, 뭐가 잘못된 건 지도… 그저 내가 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안아주었다. 그렇게 한나절이 흘렀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데 남편은 웃으면서 다행이라고 했다. 사실 자신은 기형아임을 확진받아서 속상해서 울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 아이를 지워야 하는지 낳아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유산 이야기를 듣더니 건강하지 못한 채로 세상에 나오면 엄마 아빠 힘들까 봐 아이가 먼저 가기로 선택했던 게 아닌가 싶다면서, 아이를 떠나보내는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평창 오대산에서 아이를 보내주고 돌아와 수술을 해서 완전히 떠나보냈다. 그 당시 나는 작은 마케팅 회사에 다녔었고 밤낮 휴일 없이 바쁜 일상이었다. 임신 중에도 일을 놓을 수 없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중요한 임신 초기를 쉼 없이 보내야 했었다. 남편은 좀 쉬면서 하라고 걱정을 했던 터라 유산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자책감도 들어서 남편이 나를 원망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저 말없이 생각을 했고 나를 탓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일상적으로는 말이 없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나는 늘, 남편에게 위안받고 힘을 얻고 있었다. 이번 제주 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남편은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아이들의 일정을 체크하는 게 전부였다. 돈이 많아도 나처럼 살지 못하는 아내가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서로에게 서운하고 속상한 일들로 위기가 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들의 기억들로 우리는 또 그 위기를 잘 이겨낼 것 같다. 부부란 그렇게 행복한 추억을, 함께 한 기억을 먹고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