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분열된 아이덴티티와 과잉 페르소나의 시대

by 가오나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86


“All human beings, as we meet them, are commingled out of good and evil.”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존재다.
“Man is not truly one, but truly two.”
인간은 진짜로 하나가 아닌, 진실로 두 존재다.


1.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회의실에서는 침착한 프로페셔널이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무표정한 생존자가 되며, SNS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인플루언서가 된다. 내가 존재하는 플랫폼마다 요구되는 얼굴은 다르고, 우리는 그 얼굴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문제는 이 얼굴들이 너무 많아져서, 정작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얼굴은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세상에 내보낸 수십 개의 얼굴들은 과연 진짜 나와 어디쯤 닿아 있는 걸까. 혹은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얼굴을 살아내느라, 정작 ‘나’라는 중심에서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세기말에 발표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현대인의 정체성 불안을 예견한 작품이다.


2.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배경인 1880년대 빅토리아 시대는 절제와 품위를 중시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말할 수 없는 충동과 폭력, 향락과 빈곤이 억눌린 채 쌓여 있었다.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은 한 개인의 심리적 분열을 넘어, 시대 전체가 감춰온 이중성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지킬 박사는 이 시대가 요구한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존경받는 의사이자 도덕적인 시민, 흠결 없는 신사. 그러나 그는 약을 만들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과 충동,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모든 감정을 하나의 존재로 떼어낸다. 그 결과 탄생한 인물이 에드워드 하이드다. 하이드는 점점 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존재로 변하며 지킬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지킬은 마침내 자신 안에서 일어난 이 분열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 속에는 억압된 욕망, 이중적 정체성, 자아의 균열—근대 심리학이 다루게 될 모든 문제가 이미 응축되어 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론화하기 전부터, 스티븐슨은 이미 인간 안의 숨겨진 자아를 문학으로 그려낸 것이다. 융(Carl Jung)이 말한 '그림자(Shadow)', 즉 의식이 부정하고 억압한 자아의 어두운 면이 바로 하이드의 정체였다.


3.

지킬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얼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올곧고 선량하며 결점 없는 사람. 그는 그 이미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완벽히 감추었다 - 어쩌면 지킬 자신조차 알지 못했을 그림자를. 하지만 그림자는 감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왜곡되고, 증폭된다.


하이드는 지킬이 지워버린 감정과 욕망의 '잔재'가 아니다. 그는 지킬이 끝내 마주하지 못한 자아의 일부, 혹은 본질에 가깝다. 지킬이 살아남기 위해 제거한 자아가 하이드라면, 하이드는 지킬이 한 번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은 욕망들의 응답이기도 하다.


지킬이 사용한 '약물'은 자아를 분리하는 기술적 장치였다. 그는 약을 통해 '보여줘야 하는 나'와 '숨겨야 하는 나'를 물리적으로 나누려 했다. 우리에게도 지킬의 약물과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플랫폼이다.


SNS 계정, 메신저 프로필, 업무용 이메일, 데이팅 앱. 우리는 각각의 플랫폼에서 서로 다른 버전의 자아를 구축한다. 지킬이 약으로 자아를 분리했다면, 우리는 디지털 도구로 자아를 분산시킨다. 융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persona), 즉 ‘사회적 가면’을 만들어 서로 다른 무대에 올려놓는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정제된 나, 저기에서 사용하는 특정 말투, 그리고 관계 안에서 유지해야 하는 특정한 태도. 문제는 이 페르소나가 너무 많아지면 정작 '나의 아이덴티티, 그 본질’은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멀티 플랫폼의 시대, 우리는 지킬보다 훨씬 더 많은 얼굴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균형은 더 어렵고, 붕괴는 더 쉽다. 그리고 지킬처럼 우리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서 어떤 얼굴이 진짜 나인지 구별할 수 없고 통제력을 잃은 채 페르소나들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나는 지금 몇 개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얼굴들은 나를 지탱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는가.

어떤 감정들은 하이드처럼, 한밤중에만 나를 찾아오지 않는가.
나만이 알고 있는 흉측한 얼굴들을 애써 부정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너무 많은 페르소나를 굴리느라, 정체성의 중심에서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융은 말했다. "그림자를 의식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운명이 되어 나타난다." 하이드는 지킬이 오래전부터 꺼내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용히 쌓여 만들어낸,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얼굴이 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채로.


5.

페르소나는 시대가 만들어준 얼굴이지만, 아이덴티티는 내가 살아야 하는 얼굴이다.

플랫폼의 시대는 우리에게 더 많은 표현의 기회를 주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잃기도 쉽다.


지킬이 실패한 지점은 욕망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페르소나들을 통합하는 중심축이다. 어떤 얼굴을 쓰고 있든, 그 아래에는 일관된 가치와 신념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 그것이 아이덴티티다.


그리고 그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가장 불편한 얼굴, 우리의 하이드와도 마주 앉아 대화해야 한다. 통제하거나 제거하려 하기보다, 존재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얼굴들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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