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에서 탄생한다.

〈죠스〉, 〈쥐라기 공원〉, 〈아나콘다〉, 〈킹콩〉

by 가오나시

〈죠스〉(Jaws, 1975)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아나콘다〉(Anaconda, 1997) 감독: 루이스 로사

〈킹콩〉(King Kong, 1933/2005) 감독: 메리언 C. 쿠퍼, 어니스트 B. 쇼드삭 / 피터 잭슨


1. 공포는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로부터 시작된다

상어는 4억 년 동안 바다를 유영해 왔다. 대왕 아나콘다는 아마존 강 유역에서 수천 년간 먹이사슬의 정점을 지켜왔다. 공룡은 1억 6천만 년 동안 지구의 주인이었고, 고릴라는 수백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 밀림에서 조용히 살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자연의 질서를 따르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크린 위에서 그들은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왜 우리는 공룡의 이빨에서 공포를 느끼고, 뱀의 몸통에서 소름이 돋고, 거대한 유인원의 포효에서 재앙을 연상하는가? 이 생명체들이 본디 괴물이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 글은 네 편의 영화를 따라가며, 자연의 존재를 괴물로 변모시킨 ‘시선의 정체’를 하나씩 드러내려 한다.


2. 괴물을 발명하는 네 가지 시선

〈죠스〉: 손실이 만든 절대악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에서 상어는 관광지의 평화를 깨뜨리는 불청객이다. 시장 래리 본의 눈에 상어는 생태적 포식자가 아니라 ‘관광 수익을 갉아먹는 영업 방해 요소’ 일뿐이다. 상어가 위협적인 진짜 이유는 사람을 물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해변에 오지 않게 만들어 경제적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상어는 집단의 이익을 해치는 순간 즉시 ‘제거해야 할 괴물’로 규정된다. 공포의 근원은 상어의 이빨이 아니라 인간의 손익계산서 위에서 증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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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 공원〉: 통제 실패가 만든 재앙

〈쥬라기 공원〉(1993)에서 공룡은 억만장자의 야심이 낳은 ‘통제 가능한 상품’이다. 설계자 존 해먼드는 생명을 코드와 데이터로 가둘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생명은 길을 찾는다” 는 말처럼 자연은 인간의 오만을 비웃으며 울타리를 넘어선다. 공룡이 괴물로 변모하는 지점은 이빨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인간이 세운 완벽한 시스템이 무너져 ‘불확실성’이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이다.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당혹감이 곧 공포의 실체가 된다.


〈아나콘다〉: 무지가 만든 적대감

〈아나콘다〉(1997) 속 아나콘다는 아마존의 정당한 주인이지만, 외지인들의 눈에는 정복하고 관찰해야 할 대상 혹은 100만 달러짜리 상품에 불과하다. 침입자들은 타자의 영토에 발을 들이면서도 그곳의 질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아나콘다의 방어 기제를 ‘이유 없는 공격성’으로 오독하는 인간의 시선은 낯선 것을 곧 위협으로, 위협을 곧 악으로 규정한다. 괴물은 정글의 야성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무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킹콩〉: 소비가 만든 비극

〈킹콩〉(1933/2005)에서 정글의 왕은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의 ‘자극적인 콘텐츠’로 전락한다. 킹콩을 죽인 것은 비행기의 기관총도 미녀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즐기며 환호했던 군중의 관음증적인 시선이다. 경외의 대상이어야 할 야성이 돈이 되는 볼거리로 소비될 때, 가장 잔인한 괴물은 사슬에 묶인 짐승이 아니라 그 비극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객석의 눈동자다.


3. 괴물의 민주화: 오늘, 당신은 누구를 사냥했는가

스크린 속 상어와 킹콩은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다. CG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들은 오히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클래식'이 되었다. 대신 우리는 ‘괴물의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다. 거대한 재난이 없어도, 우리는 클릭 몇 번으로 타인을 ‘위험한 존재’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공포는 이제 소수의 상상력이 아니라, 다수의 시선 속에서 손쉽게 복제된다.


오늘날 인간은 더 이상 거대 생물에게 괴물의 역할을 빌리지 않는다. 익명성 뒤에 숨어 내 이익을 침해하는 집단을 ‘상어’로 규정해 격리하고, 내 통제를 벗어난 누군가를 ‘공룡’으로 몰아세우며, 내 신념과 다른 타인을 ‘아나콘다’라 부르며 적대시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공포나 혐오를 투사할 ‘먹잇감’으로 가공해 내는 순간,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포식자가 된다.


〈죠스〉의 이빨보다 날카롭고 〈킹콩〉의 악력보다 파괴적인 것은 바로 우리의 비뚤어진 시선이다. 괴물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관찰자의 눈 속에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