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앤 올〉, 〈렛 미 인〉, 〈박쥐〉
사랑이라는 이름의 최후의 연대 - 사랑은 이들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본즈 앤 올〉(Bones and All): 2022년, 미국,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주연: 테일러 러셀, 티모테 샬라메
〈렛 미 인〉(Let the Right One In / Låt den rätte komma in), 2008년, 스웨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Tomas Alfredson)
주연: 카레 헤데브란트 (Kåre Hedebrant), 리나 레안더손 (Lina Leandersson)
〈박쥐〉(Thirst), 2009년, 대한민국
감독: 박찬욱
주연: 송강호, 김옥빈
노을이 지는 광활한 미국의 평원 위에서 피 칠갑을 한 채 서로를 응시하는 두 소년 소녀가 있다. 하얀 눈밭 위로 붉은 선혈이 튀고, 그 서늘한 풍경 속에서 말없이 손을 맞잡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신부의 사제복 위로 탐욕스러운 쾌락의 흔적이 얼룩지는 새벽의 동이 튼다.
이 강렬하고도 비극적인 장면들 속에서 이 영화들은 '어떻게 인간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왜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는가'를 추적한다. 〈본즈 앤 올〉의 마렌과 리, 〈렛 미 인〉의 오스칼과 이엘리, 〈박쥐〉의 상현과 태주에게 사랑은 치유도 낭만도 아니다. 사랑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형태의 연대다.
1. 울타리 밖의 존재들
세 영화 모두 자신이 속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이 ‘동류’를 만나며 세계를 다시 정의하는 이야기다.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경계 밖에서 이들은 ‘사랑’을 발견하지만, 그 사랑은 구원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결탁이자 서로의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들에게 사랑은 낭만이기 전에 생존을 위한 최후의 연대이며, 그 연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리는 처절한 증명이다.
〈본즈 앤 올〉의 마렌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먹는 '이터(Eater)'였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3살 때 처음 베이비시터를 먹은 이후로 마렌의 삶은 끊임없는 도망이었다. 열여덟 살 생일에 다시 사고를 친 마렌은 이제 아버지마저 떠나고 혼자가 되었다.
〈렛 미 인〉의 오스칼은 매일 맞고, 모욕당하고, 늘 혼자다. 오스칼은 매일 밤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모두를 향한 복수를 연습한다. 어느 날 밤, 옆집에 또래의 소녀가 이사 온다. 맨발로 눈 위를 걷고, 밤에만 나타나는 이상한 아이지만 오스칼은 그 아이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박쥐〉의 상현은 가톨릭 신부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그러나 살아난 대가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친구 강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강우의 아내 태주를 만난다. 태주는 남편에게 억눌리고 시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자신의 욕망을 단 한 번도 표현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상현을 마주하는 순간, 내면 깊숙이 숨겨둔 자신의 갈증을 처음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 밖에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유일한 존재를 만난다.
2. 소외와 연대: 너를 알아본다는 것의 의미
동류를 알아본다는 것. 이것은 이 영화들에서 생존의 문제다. 사회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튕겨 나간 이들에게, 본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는 일이다.
〈본즈 앤 올〉에서 '이터'들은 냄새로 서로를 감지한다. 마렌이 리를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서로가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알아챈다. 설명도 변명도 필요 없다. "너도 그렇구나."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이들의 사랑은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며, 장소가 아닌 ‘동행’ 그 자체가 집이 된다. “Bones and All”이라는 고백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섭식과 존재 전체를 포함한 승인의 언어이며, 괴물의 문법으로 쓰인 가장 인간적인 헌신이다.
〈렛 미 인〉의 오스칼은 묻지 않는다. 이엘리가 무엇인지, 왜 피 냄새가 나는지. 왜 "들어와도 돼"라는 허락 없이는 문을 넘지 못하는지. 둘은 결핍을 매개로 연결된다. 소년과 소녀의 관계는 따스한 위로나 치유가 아니라, 서로가 없으면 무너지고 마는 상호 의존적 생존에 가깝다. 이들의 유대는 순수한 동심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이면은 결코 무해하지 않은 생존의 결탁이다.
〈박쥐〉에서 태주와 상현의 관계는 발견을 넘어선 ‘각성’의 촉매다. 상현을 통해 태주는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굴레를 벗어던진다. 그녀가 내뱉는 “나는 부끄럼 타는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숨겨왔던 광기를 해방하는 선언이다. 둘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현은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태주는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추방된 이들에게 ‘나를 알아보는 존재’는 이미 구원인가, 아니면 함께 추락할 동반자인가?
3. 세계 이탈의 서사: 성장은 정상으로의 편입이 아니다
세 영화 모두 '성장 서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도착점은 사회 적응이 아닌 세계 이탈이다.
일반적인 성장 서사에서 주인공은 미숙한 상태로 사건을 겪고 깨달음을 얻어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애초에 그 사회에 자리가 없다. 이들의 성장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속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이며, 세 주인공 모두 끝내 세계의 바깥을 선택한다.
마렌은 '이터'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리와 함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터’의 유전자를 물려준 어머니의 비극적인 과거를 마주한 뒤, 그녀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포기하고 리와 둘만의 방식으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로 선택한다. 마렌의 성장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긍정하는 세계를 선택하는 일이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살며 내면의 폭력성을 숨기던 오스칼은 이엘리를 만나 그 본능을 '허락'받는다. 오스칼은 결국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와 가족,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삶을 등지고 이엘리와 함께 떠난다. 이는 사회 적응이 아닌, 괴물의 세계로의 자발적인 이탈이다.
상현은 괴물이 되고도 인간이고자 발버둥 치지만, 태주를 만나면서 억눌러왔던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만남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의 가속 페달이 된다. 결국 태주는 멈추지 않고 상현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며, 두 사람은 함께 햇빛 아래에서 소멸하는 파국의 세계를 선택한다.
이 영화들이 말하는 성장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안주가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각성과 세상으로부터의 은폐를 거쳐, 동류와 함께 기꺼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치열한 선택의 결과다.
4. 경계의 붕괴: 사랑은 괴물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사랑이 괴물을 구원하고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미녀와 야수〉처럼 사랑의 힘으로 저주가 풀리고, 괴물은 왕자가 된다.
이 세 영화는 그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사랑은 괴물성을 지우지 않으며, 인간성을 ‘회복’시키지도 않는다. 대신 이들은 더 불편하고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
〈본즈 앤 올〉의 마렌과 리는 끝까지 ‘이터’로 남는다. 사랑한다고 해서 식인 본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사냥하고 그들만의 연대를 지킨다. 사랑이 그들을 인간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괴물인 채로,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다.
〈렛 미 인〉의 오스칼은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다. 위에서 괴롭히던 아이들이 그의 머리를 누르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피 묻은 이엘리의 손이 내려온다. 오스칼은 그 손을 잡는다. 사랑이 이엘리를 인간으로 바꾸지도 않았고 오스칼을 구원하지도 않았다. 괴물인 채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그 자체가 이 관계의 본질이다.
〈박쥐〉의 상현은 자해에 가까운 금욕과 신앙의 잔해에 매달리며 인간으로 남고자 안간힘을 쓴다. 반면 태주는 억눌려 살던 삶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포식자적 욕망을 긍정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성'에 집착한 상현과 '괴물성'을 기꺼이 껴안은 태주는 막다른 길에서 소멸이라는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세 영화는 공통된 답을 내놓는다. 사랑은 괴물을 인간으로 ‘되돌리지’ 않지만, 괴물의 몸으로도 연약함과 헌신, 수용의 순간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과 괴물성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한 존재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층위이며, 사랑은 그 경계 자체가 허구였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5. 그 손을 잡는다는 것
세상의 바깥에서 만난 유일한 손. 그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구원받는가, 함께 추락하는가?
영화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사랑은 '우리'라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들의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피 냄새가 나고, 위험하며, 때로는 파멸적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거나, 상대의 가장 추악한 모습까지 껴안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함께 추락할지언정 기꺼이 서로의 손을 잡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세상 끝에 내몰린 괴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연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