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없는 것들과 마주했을 때 (1)

외계침략 영화가 인간을 시험하는 방식

by 가오나시

시리즈를 시작하며

이 시리즈는 외계 문명의 유입과 외계인을 다룬 영화를 이야기하지만, 단순히 “어떤 영화가 어떤 외계인을 보여주었는가”를 나열하지 않는다.
우리가 따라가려는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외계라는 가상의 조건 아래에서, 인간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포기하는가.


먼 우주가 빛을 잃은 새벽, 초소의 레이더에 포착된 낯선 신호처럼 이 질문은 고요하게 시작된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 우주선이 드리운 그림자가 도시의 마천루를 삼킬 때, 혹은 우리가 아는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금속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때,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는 무력해진다.


외계 침략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 잔혹한 불균형에 있다. 최첨단 미사일이 보이지 않는 방어막 앞에 불꽃놀이처럼 스러지고, 위대한 문명이 단 한 번의 섬광으로 재가 되어 버린다. 모든 면에서 압도당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그 처절한 찰나에서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한다.


외계인은 적이기 이전에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실험적 장치이자 차가운 관찰자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모든 것이 무너진 이 폐허 위에서, 너희는 도대체 무엇인가.”


앞으로 다섯 편의 글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다른 형태의 시험지로 펼쳐볼 것이다.

1편 ‘힘의 시험’에서는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원초적 존재론을 다룬다.

2편 ‘정체성의 시험’에서는 외계 침략의 공포가 내면으로 침투할 때 스스로가 자신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3편 ‘의미의 시험’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믿음과 언어, 시간의 개념을 추적한다.

4편 ‘시선과 윤리의 시험’에서는 우리가 외계 존재를 소비해 온 방식을 성찰하며 현대적 시선과 스펙터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한다.

5편 ‘공포의 진화’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 시험의 양상을 조망하며, 인류가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남았는지를 정리하며 연재를 마무리한다.


이 가운데 첫 번째 글은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1편] 압도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2005,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톰 크루즈, 다코타 패닝

〈콰이어트 플레이스, A Quiet Place〉2018, 감독: 존 크라신스키, 주연: 존 크라신스키, 에밀리 블런트

〈인디펜던스 데이, Independence Day〉 1996,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윌 스미스, 빌 풀먼

〈지구가 멈추는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2008, 감독: 스콧 데릭슨, 주연: 키아누 리브스, 제니퍼 코넬리


재난처럼 도래하는 것들

“냉혹하고 무자비한 지적 존재들은 질시의 눈초리로 지구를 지켜보았고 지구 정복 계획에 착수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우주전쟁〉(2005년)에서 외계 트라이포드는 어느 날 번개와 함께 내려온다. 왜 하필 지금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스필버그는 의도적으로 외계인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 불길한 계획의 결과만을 경험할 뿐이다." 외계인에게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재난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의 외계 크리쳐들도 마찬가지다. 운석과 함께 지구에 떨어진 이 괴물들은 인간의 무기로는 결코 뚫을 수 없는 갑옷 같은 외피를 두른 채 오로지 소리를 향해 돌진한다. 외계괴물의 침략 89일째, 대부분의 인류는 숨죽인 채 사라졌다. 외계 존재는 인간에게서 단순히 생명만 뺏는 것이 아니라, '소리'조차 뺏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정적의 수신호를 보내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산고 속에서도 비명을 삼켜야 한다. 왜 그들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문명을 지탱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저 포식자의 귀를 피해 숨죽이며 기어 다니는, 거대한 침묵의 감옥에 갇힌 포획물로 전락한다.


문명의 즉각적 붕괴

〈인디펜던스 데이〉(1996)는 외계 침략 영화 중 가장 화려하면서도 압도적인 파괴의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영화의 백미는 거대 우주선이 도시 위로 그 위용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직경 24킬로미터에 달하는 금속의 요새가 구름을 뚫고 내려와 마천루를 그림자로 지워버린다. 그 중심에서 발사된 한 줄기 푸른 광선은 백악관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단숨에 불기둥으로 만들고, 그 불길은 거리를 집어삼키며 모든 문명의 흔적을 먼지로 증발시킨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기존 영화들의 접근 방식에 의문을 던졌다. "외계인들이 그토록 먼 우주를 가로질러 와서는, 어딘가에 숨어 간을 보기만 한다는 설정이 늘 이상했다." 그래서 그는 도착 즉시 망설임 없는 전면전을 택했다.

인류의 반격은 처참할 정도로 무력하다. 인류 최후의 보루인 핵미사일은 허공에서 소멸하고, 최신예 전투기 편대는 파리 떼처럼 추락한다. 전 세계의 군사력이 단 하루 만에 무력화되는 이 광경은 망치로 가볍게 유리 잔을 깨뜨리듯,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견고한 과학과 문명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공포와 묘한 해방감을 동시에 자극한다.


〈우주전쟁〉의 외계 트라이포드가 내뿜는 열선은 인류의 육체를 단숨에 증발시킨다. 방금 전까지 곁에서 함께 비명을 지르던 이웃이 한 줌의 회색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리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만이 주인 잃은 허물처럼 지상으로 낙하한다. 주인공 레이 페리어(톰 크루즈)는 바로 그 이웃이었던 '재'를 온몸에 하얗게 뒤집어쓴 채 유령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9/11의 비극적인 잔상을 소환한다. 스필버그는 인터뷰에서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미지는 9/11의 그림자 속에서 맨해튼의 모든 사람이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도망치던 모습입니다.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가슴에 낙인처럼 찍힌 강렬한 장면이었다."고 고백했다.

스필버그 감독에게 외계 침략은 먼 미래의 공포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경험한 재난의 확장판이다. 여기서 외계인은 정복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비극 그 자체다.


도망, 은신, 적응 — 남겨진 선택지들

문명이 무력화된 후, 인간에게 남는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다. 도망치거나, 숨거나, 적응하거나.


〈우주전쟁〉의 레이는 싸우지 않는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이혼한 아버지이고,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색하며,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남자다. 영화 내내 그가 하는 일은 오직 도망이다. 뉴저지에서 보스턴까지, 트라이포드를 피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아들 로비가 인류를 위해 군대에 합류하겠다며 혈기 왕성하게 나설 때, 레이는 이를 필사적으로 가로막는다. 그에게 당면한 과제는 인류의 승리가 아니라 오로지 가족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이러한 레이의 행보를 두고 "가족을 지키려는 미국인의 정신"이라 명명했지만, 실상 그것은 '포기'의 또 다른 이름에 가깝다. 거대한 공격 앞에 맞서 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뼈저리게 목격한 인간이, 승리라는 오만을 내려놓고 비참하게라도 살아남는 길을 택한 것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애보트 가족은 숨는다. 맨발로 걷고, 수화로 대화하며, 모래를 깔아 발소리를 죽인다. 이들의 모습은 문명인이라기보다 포식자를 피하는 연약한 들짐승의 그것과 닮아있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에밀리 블런트가 욕조에서 출산하는 순간이다. 산고로 온몸을 찢는 고통의 순간에도 그녀는 결코 비명을 내뱉을 수 없다. 입을 틀어막고 눈물로 고통을 삼키며 침묵을 강요받는 이 장면은, 압도적 존재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력을 증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얼마나 가혹하고도 비참한지 증명한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소리 내어 울거나 웃을 수 없는, '침묵의 감옥'에 갇힌 포획물로 전락한다.


〈지구가 멈추는 날〉(2008)의 외계 사절 클라투는 앞선 영화들과는 다른 종류의 시험을 제시한다. 그는 파괴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지구'를 구하기 위해 도래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구하고자 하는 지구에 '인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해리 베이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1951년작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했다면, 2008년 리메이크작은 인류로 인한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로 그 메시지를 교체했다. 결국 인류는 살려달라는 처절한 애원 끝에, 외계가 제시한 새로운 생태적 질서에 따라 변화해야만 생존을 허락받는 '조건부 생존자'로 전락하고 만다.


존재를 증명하는 마지막 선택

외계침략 영화에서 인류는 종종 이긴다. 〈인디펜던스 데이〉에서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핵미사일의 조합이, 〈우주전쟁〉에서는 지구의 미생물이 외계인을 쓰러뜨린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는 보청기의 고주파 피드백이 괴물의 치명적 약점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이 승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직접적으로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대부분이 우연이거나 요행이다.


진짜 질문은 승리 여부에 있지 않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 싸우는 존재인가, 살아남는 존재인가.


〈우주전쟁〉에서 레이는 살아남기 위해서 외계인에 맞서 싸우겠다고 고집 부리는 아들을 붙잡지 못하고 자신과 딸을 벙커에 숨겨준 할란 오길비도 죽인다. 저항하려는 자를 버리고, 죽이고, 숨어서 살아남는 것이 극한 상황에서 레이가 내린 선택이다. 반면〈인디펜던스 데이〉의 러셀 케이스는 다른 길을 간다. 한때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고 주장해 조롱거리가 되었던 이 남자는, 최후의 전투에서 자신의 전투기를 외계 우주선에 돌진시킨다. 이는 자기희생으로 인류를 구한 영웅적인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는 이길 방법이 없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무력함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험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이 싸우는 존재도 아니고 단순히 살아남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붙잡을지,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 처절한 결단들이 모여 인간이라는 존재의 마지막 존엄을 완성한다.




다음 편에서는 '정체성의 시험'을 다룬다. 외계인이 인간의 몸을 빼앗거나 우리 사이에 숨어들 때, 어떻게 나와 너를 구별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