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없는 것들과 마주했을 때 (3)

이해의 심연에서 길을 잃다: 불투명한 세계를 견디는 법

by 가오나시

〈콘택트〉(Contact, 1997, 로버트 저메키스) 조디 포스터, 매튜 매커너히 주연

〈싸인〉(Signs, 2002, M. 나이트 샤말란) 멜 깁슨, 호아킨 피닉스 주연

〈컨택트〉(Arrival, 2016, 드니 빌뇌브) 에이미 애덤스, 제러미 레너 주연


"우주에 만약 우리만 있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겠지."
(If it's just us, it seems like an awful waste of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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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라는 거대한 거울, 그 속의 '알 수 없음'

인간은 살아가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하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납득하기 어려운 자연재해, 혹은 개인의 통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그러하다. 영화사에서 이러한 '압도적인 이해 불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소재는 바로 '외계 존재와의 조우'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비행물체나 정체불명의 신호는 단순히 SF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를 넘어, 인간이 가진 지성과 논리가 무용지물이 되는 지점을 상징한다. 〈콘택트〉, 〈싸인〉, 그리고 〈컨택트(Arrival)〉라는 세 편의 영화는 외계인을 물리쳐야 할 적군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거대한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끝내 그 불투명한 세계를 어떻게 견뎌내는지를 묻는다.


1. 신호와 잡음 사이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도구를 들고 '미지'의 영역에 접근한다.


먼저 〈콘택트〉의 엘리 애로웨이는 철저히 과학적 방법론에 의지한다. 그녀에게 외계의 신호는 해독해야 할 수학적 암호이자 증명 가능한 실체다.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엄청난 공간 낭비일 것"이라는 믿음 아래, 그녀는 잡음이 섞인 우주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내려 한다.


반면 〈싸인〉의 그레이엄 헤스는 의미 찾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전직 신부였던 그는 아내의 비극적인 사고사 이후 모든 사건에서 섭리를 지워 버렸다. 그에게 외계인의 존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닥쳐온 재앙일 뿐이다. 그는 무작위로 발생하는 사건들 속에서 어떠한 질서도 읽지 않으려 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컨택트〉의 루이스 뱅크스가 맡은 과제는 지구를 침략한 거대 외계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문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헵타포드와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그녀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아닌,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도구(과학, 신앙, 언어)로 심연을 들여다보지만, 인간의 도구가 우주의 거대함을 담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한계에 곧 부딪힌다.


2. 불확실성이 낳는 공포

각 영화가 그리는 공포의 결은 다르다. 〈콘택트〉에서 엘리는 웜홀을 통해 여행을 하고, 외계 존재를 만난다. 그러나 지구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단 몇 초밖에 흐르지 않았고, 아무런 물리적 증거도 남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경험했을 뿐 타인에게는 결코 증명할 수 없는 이 진실은, 마치 빛조차 닿지 않는 광막한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근원적인 고립과 공포를 자아낸다.


〈싸인〉의 공포는 더 원초적이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밭 가장자리에 숨어 있고,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가족을 위협하지만 그레이엄은 무력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막고 지하실로 숨는 것뿐이다. 그러나 외계인보다 더 무서운 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처절한 무력감이다.


〈컨택트〉의 공포는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외계인의 메시지 중 "무기를 제공한다(offer weapon)"라는 문장이 전 세계적 공황을 일으킨다. '무기'인가, '도구'인가? 번역 하나의 오류가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 소통의 불완전성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 된다.


3. 믿음과 선택

흥미로운 건 세 영화 모두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콘택트〉에서 과학자 엘리는 평생을 실증과 데이터에 헌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끝에서 아무런 물리적 증거 없이 자신의 경험을 믿어 달라고 청중에게 호소한다. 가장 이성적이었던 인물이 역설적으로 '증거를 넘어선 신뢰'를 요청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지만 영화는 이 역설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신앙이 공유하는 지점인 '증명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신뢰'를 조명하며 인간 존재의 담대한 결단을 강조한다.


〈싸인〉의 그레이엄은 정반대의 여정을 걷는다. 아내의 마지막 말("스윙해, 메릴"), 딸의 물 남기는 버릇, 아들의 천식—사건들 후에 이 모든 것이 '우연'인지 '섭리'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레이엄은 섭리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논리적으로 정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세상이 의미 있다는 믿음이고, 그 믿음을 통해 그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컨택트〉의 루이스가 직면한 선택은 가장 가혹하지만 숭고하다. 외계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비선형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능력을 갖게 된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스러운 미래, 즉 아이와의 만남과 필연적인 이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올 슬픔을 회피하는 대신, 그 삶의 모든 순간을 주저 없이 껴안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예견하면서도 현재의 첫발을 내딛는 용기야말로, 〈컨택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가장 단단한 믿음의 형태다.


4. 열린 결말, 닫히지 않는 질문들

세 영화는 모두 의도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콘택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부 관계자들이 은밀히 대화한다. 엘리의 녹화 장치에 그녀가 경험했다고 주장한 시간과 일치하는 18시간 분량의 정적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면 엘리의 주장은 증명된 것인가? 영화는 이에 대해 끝내 확답을 주지 않는다. 이 18시간의 기록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증거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으로 남겨둘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싸인〉은 그레이엄의 신앙 회복으로 끝나지만, 관객에게 같은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내의 유언이 정말로 미래를 예견한 신성한 메시지였는지, 아니면 그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여전히 관객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영화가 진정으로 조명하는 지점은 그레이엄이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흩어진 삶의 파편들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재건해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컨택트〉의 결말은 한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안이 루이스에게 묻는다. "인생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다면, 무언가를 바꾸겠어?" 루이스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서 무엇도 바꾸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그녀의 결정은 스스로 내린 '선택'인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또한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영화는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대신, 루이스의 마지막 독백을 통해 깊은 울림을 전한다.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순간을 환영하기로 했다"(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라는 그녀의 고백은, 예정된 슬픔까지도 삶의 일부로 껴안겠다는 고결한 수용의 의지를 보여준다.


알 수 없음 앞에서 내딛는 한 걸음

세 영화가 제안하는 답은 각각 다르다. 〈콘택트〉는 미지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를, 〈싸인〉은 주어진 운명에 대한 '수용'을, 〈컨택트〉는 슬픔까지 껴안는 '포용'을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세계는 본래 불투명하며, 인간은 결코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야 하는지, 왜 간절한 노력이 때로 배신당하는지, 그리고 왜 나의 삶이 도저히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는 법은 그 불투명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서로를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 열린 결말들은 우리가 마주한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