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이유에 대하여
〈127시간〉(127 Hours, 2010, 미국·영국, 대니 보일 감독, 제임스 프랭코 주연)
〈미스트〉(The Mist, 2007, 미국,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토머스 제인 주연)
욕망의 가장 원초적인 이름
인간이 느끼는 욕망에는 위계가 있다. 권력을 갖고 싶다는 욕망,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이것들은 모두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야 비로소 고개를 드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욕망의 가장 밑바닥,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에 하나가 있다.
살고 싶다는 것.
이것을 보통 생존 본능이라고 부른다. 본능이라는 단어는 이 욕망을 너무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 실제 생존의 순간은 훨씬 복잡하다. 거기에는 판단이 있고, 선택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포기가 있다. 생존은 본능이기 이전에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어떤 사람은 놓아버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 두 가지 근본적인 충동이 경쟁한다고 보았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삶을 향한 충동과 죽음을 향한 충동. 생존의 순간이란 이 두 힘이 가장 날카롭게 맞붙는 순간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이 싸움이 언제나 에로스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죽고 싶지 않다는 것과 살고 싶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고통을 피하려는 반응이고, 후자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위다.
혼자이기 때문에 마주한 것들 — 〈127시간〉
2003년 어느 날, 자유로운 등반가 아론 랠스턴은 유타주 블루존 캐니언으로 혼자 들어갔다. 그에게 여행은 자유이자 해방이었기에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굳이 알리지 않았다. 협곡을 내려오던 중 굴러 떨어진 바위가 그의 오른팔을 협곡 벽에 짓이겼다. 그가 가진 건 물 한 병, 무딘 칼, 캠코더 그게 전부였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바위에 낀 팔이 아니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른다"는 자각이다. 연결의 완전한 부재,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다른 종류의 공포다.
아론은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탈출을 시도하면서도 캠코더 앞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유언을 녹화한다. 어찌 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죽음을 인정했더니 삶이 선명해졌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사람은 잃을 것이 없다고 느낄 때 비로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욕망과 마주한다. 아론이 5일 동안 환각과 탈수와 절망 속에서 떠올린 것들 — 가족의 얼굴,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 아직 하지 못한 것들 — 은 아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돌려주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은 추상적인 생명 의지가 아니었다. 아주 구체적인 얼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욕망이 결국 아론으로 하여금 자신의 팔꿈치 아래를 자르게 했다. 엄청난 고통 끝에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바위에서 풀려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아론은 왜 팔을 자르면서까지 살고 싶었는가? 용기? 의지력?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론이 혼자였기 때문에 — 철저하게, 완전히 혼자였기 때문에 — 그는 다른 누구의 판단도 빌릴 수 없었다. 포기하라고 말해 줄 사람도, 살아야 한다고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만 그 답을 찾아야 했다. 고립은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과 마주하게 만든다. 아론은 그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함께이기 때문에 무너진 것들 — 〈미스트〉
〈미스트〉는 같은 질문을 전혀 다른 조건에서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 마트 안에 갇혀 있지만, 음식과 물이 있고, 서로가 있다. 표면적으로 이쪽이 훨씬 유리해 보인다.
안개가 몰려온 작은 마을, 마트에 고립된 수십 명의 사람들. 주인공 데이빗은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려 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지 않고,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거침없이 잔인하게 죽이는 괴물의 존재가 확인되고, 출구가 보이지 않자 마트 안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포가 집단을 어떻게 변형시키는가의 이야기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은 설명을 원한다. 설명이 없으면 만들어낸다. 종말을 외치는 카모디 부인의 말이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그녀의 논리가 옳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포는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는다. 집단 안에서 공포는 증폭된다.
데이빗은 이 광기와 패닉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마트를 탈출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씩 잃었다. 사람들을, 희망을, 마지막으로 돌아갈 이유까지. 오갈 곳이 없어진 일행들은 정처 없이 안갯속을 헤매고 결국 차의 연료가 떨어졌다. 안갯속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총알은 네 발 남아 있었다.
이 영화가 가장 잔인한 것은 괴물이 아니다. 데이빗 일행이 포기한 그 순간,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 "조금만"이 영화를 보는 내내 위장을 뒤집는다.
그들의 포기는 나약함이 아니다. 희망의 소진이다. 희망은 무한한 자원이 아니다. 사람은 충분히 오래 절망하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 된다. 그 고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커지는 순간,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도 무너진다. 데이빗의 포기는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의 결핍이었다.
두 영화의 대화 — 생존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127시간〉이 묻는다. "혼자일 때 인간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미스트〉가 대답한다. "함께라도 못 버티는 순간이 있다."
〈127시간〉이 묻는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는 운이 좋은 건가, 의지가 강한 건가?"
〈미스트〉가 대답한다. "살아남은 자가 꼭 더 행복한 건 아니다."
이 두 영화는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정반대의 결말을 향해 걷는다. 그 차이는 단순히 개인의 강인함 대 집단의 나약함이 아니다.
아론은 혼자였기 때문에 고립과 마주했고, 그 고립 속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혼자라는 조건이 그를 부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자신의 내면과 가장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만들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은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얼굴들로, 되돌아가야 할 이유들로 아론 안에서 솟구쳤다.
데이빗은 함께였지만 오히려 공포 속에서 연결을 잃었다. 집단의 광기가 이성적 판단을 갉아먹었고, 안갯속의 거대한 괴물이 사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우주적 무력감을 심어 놓았다. 함께 있다는 것이 생존을 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단 안에서 공포는 더 빠르게 번졌다.
두 영화는 생존을 단순히 살아남음과 죽음의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다. 살아남은 결과가 무엇을 남겼는가를 묻는다. 아론은 팔을 잃고도 살아남았고, 자서전을 썼고, 세상을 계속 탐험했다. 그는 살아남음을 통해 자신을 발견했다.
데이빗은 살아남았지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자기 손으로 잃었다. 그에게 살아남음은 구원이 아니라 형벌에 가까웠다.
살고자 하는 욕망의 두 얼굴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왜 살고자 하는가
살고 싶다는 것은 무엇을 원한다는 뜻인가? 고통의 부재인가, 아니면 무언가의 존재인가?
〈127시간〉에서 생존 욕망의 연료는 추상적인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다. 어머니의 목소리, 여동생의 결혼식, 아직 하지 못한 등반. 살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그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총합이 클수록, 생존은 더 강렬한 에너지로 작동한다.
〈미스트〉에서는 희망이 소진되면 욕망도 소진된다. 생존 욕망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그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 한에서만 작동한다. 데이빗과 일행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그들은 진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이 이상 살아가는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부재에서 나온 행위였다.
이 두 이야기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바위에 팔이 낀 채 5일을 보낸 다음에 다시 생각해 봐야 할까? 그때도 추상적 일지.
생존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선택이다. 어떤 사람은 그 선택을 계속 갱신하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어느 순간 그 선택을 내려놓는다. 살아남은 자가 더 강한 것도, 더 운이 좋은 것도 아닐 수 있다. 다만 그 순간, 살아야 할 이유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던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