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29. 그 여자의 색깔

by 알케이

개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색 중에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색은 하얀색입니다. 그 위에 어떤 색을 칠해도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그 자체로도 뭔가 오묘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데, 실제로 하얀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사카 코타로는 그의 소설 [칠드런]에서 하얀색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사는 게 넌더리가 날 때가 있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고민이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다행이야, 이제 됐어.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한 거지, 하고 말이야.
바로 그런 때의 기분이 흰색이야.


꼭 이사카 코타로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색이 하얀색이지만 딱 한 번, 하얀색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씩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 올릴 때면 늘 하얀색이 함께 떠오르곤 합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온 그녀를 만난 것은 찰츠부르크 기차역이었어요.


인스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짧은 금발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하고 큰 배낭을 메고 있던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어딜 가느냐며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무심하게 인스부르크를 간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거기 좋아?’라며 물었고 난 아직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말을 더했고, 잠시 후 그녀는 인스부르크행 기차표를 들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기차역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지 모르겠지만-지금 생각해 보면 딱히 여행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인스부르크로 가는 내내 이어졌습니다.


체코에 외할머니가 살고 있어서 체코까지 온 김에 여기저기를 여행 중이었는데, 찰스부르크를 본 후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마침 여행자처럼 보이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얘기부터,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여행할 것인지 등등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습니다.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말이죠.


어느덧 기차는 인스부르크에 도착했고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그녀가 역시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숙소 잡았어?’


찰스부르크에서 갑자기 결정한 목적지였기 때문에 그녀는 숙소를 잡지 못한 상태였고, 찰스부르크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전화로 미리 예약을 했다는 내 얘기에 그녀는 ‘같이 가도 돼?’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 숙소가 내 것도 아닌 마당에 당연히 안 될 이유는 없었기에 함께 가기로 하고 함께 기차역을 나서는 순간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난 찰스부르크에서 산 노란색 우산이 있었고 그녀는 비 옷이 있어서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고 리셉션에 이름을 얘기하자 숙소 주인은 갸웃하더니 그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같은 방을 쓸 거냐’고 물었고, 그녀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No’를 얘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상황이 재미있었는지 서로 마주 보고 웃고는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 그 날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언제 비가 왔었는지 모를 만큼 청명하고 파란 하늘을 보며 산책을 하기 위해 숙소를 나서려는데 꽤나 큰 상자 하나를 들고 나오는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짐이 무거워 캐나다의 집으로 미리 보낼 것들을 담은 상자라는 설명과 함께 우체국에 갈 건데 어딜 가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딱히 갈 곳을 정해 놓지 않아 그냥 산책을 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즐거운 여행을 하라며 헤어졌는데, 그 이후로는 숙소에서도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인연을 가진 그녀는 이상하게도 하얀색을 떠오르게 합니다.

어쩌면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 기차역으로 온 용감함 때문일 수도 있고, 내 얘기에 순간적으로 목적지를 정한 대책 없음 때문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순진무구한 표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사카 코타로가 소설에서 정의한 이유 때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만큼 저에게 하얀색은 어려운 색이고, 그녀는 아직까지 저에게 하얀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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