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로토로 토토로
댓글에 보면 사람들이 자꾸 현실 연애와 혼동해서 연애에 대한 그럴싸한 교훈을 얻으려고 애쓰는데, 이건 현실 연애가 아닙니다. <클로저>(2004)는 소위 치정 멜로라는 멜로드라마의 한 하위장르에 속합니다. 이 장르의 룰은 치정에 관한 극단적인 캐릭터와 상황과 사건들을 보여주고서, 관객들이 ‘오메 오메, 저런 썅놈(또는 썅년) 같으니...’라고 욕하면서도 빠져들게 만드는 겁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관객의 공감을 얻기 위해 현실적인 느낌을 아주 그럴싸하게(<졸업>(1967)의 마이크 니콜스의 탁월한 연출력으로!) 환기시킬 뿐이지요.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주드 로도 아니고 줄리아 로버츠도 아닙니다.
장르영화의 재미란 피 튀기는 복싱 실황 중계보다는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의 그것에 가깝습니다. 또는 알고서도 깜박 속는 마술과 같습니다. 장르의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인물들이 정해진 스탭을 밟고, 우리는 그들의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클로저>는 명백히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되고 최고의 스타 배우들이 참여한 상업 장르영화입니다. 이 작품이 주는 세련된 고급감은 마치 아트하우스 무비를 보는 것처럼 속아넘어가게 만들긴 하지만요. 훨씬 통속적인 치정 멜로였다면 앨리스(나탈리 포트만)는 죽고 댄(주드 로)은 관객이 요구하는 징벌로써 통곡하며 후회했겠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앨리스는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나라와 본명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면에서 <클로저>는 잘 빠진 ‘수정주의’ 치정 멜로일지도 모릅니다.
공감과 감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원인을 작품의 리얼리티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예술에 대한 관성적인 오해입니다. (물론 작품에 깊이 몰입하여 현실과 허구를 혼동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리스 신화나 수퍼히어로 무비에도 감동받을 수 있으며(사실 이 둘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과장되고 극단화된 비현실적 연애 이야기에도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이렇게 리얼리티와 구분되지만 우리를 빠져들게 하고 일상에서 결핍된 감정을 충족시키는 것들을 가르켜 다름아닌 ‘판타지’라고 부릅니다. 즉 엘프와 드래곤이 판타지이듯, <클로저> 또한 판타지라는 말입니다!
끝으로 <클로저>처럼 어딘가 아트스런 영화를 보고서 고급진 문화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대게 그냥 당신의 착각입니다. 원시 부족들이 신이 내린 무당의 몸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착각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순수예술과 고급문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고급스런 느낌은 좋은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란 말입니다. 예술을 위아래로 가르는 태도 말입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려본 저의 경험에 따르면, 소위 순수예술이 인간에 대해 딱히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문예지의 개성 없는 단편소설이나 홍상수 김기덕의 해묵은 유럽 영화 따라하기보다(외국 것을 따라한 사실을 잘 감추고 현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두 분은 서태지와도 비슷합니다) <해리 포터>나 <아바타>가 인간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요. 모든 예술이 반드시 인간의 본질 어쩌구...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구요.
영화는 현실과 무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과 똑같은 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입니다. 그러니 한국 관객들, 이제 영화 볼 때 현실 타령 교훈 타령 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덧) 마지막 문장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한국 관객은 옛날부터 ‘영화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국영화에 개별 장르 시장이 좀처럼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