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묵직한 필치로 잇는 정통사극의 명맥

갓띵작인데 망했으요

by 거대고양이

사극, 또는 시대물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며 역사의 단순한 재현도 아니다(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자주 잊는 사실이다). 잘 만든 사극은 동시대 관객들이 처한 (정치적) 현실, 그로 인한 불안과 소망을 담아내는 일종의 우화(寓話)다. 여기에 볼거리와 시대 고증 등 사극만이 주는 ‘+α’를 조화시키면 금상첨화다.


<벤허>(1959)와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5). 소위 정통 사극과 퓨전의 가장 큰 차이는 역사적 재현에 대한 ‘진지함’의 정도다.

한국 사극은 크게 정통과 퓨전으로 나눌 수 있는데(아마 한중일 특유의 사극 하위장르 구분법이 아닐지), <남한산성>(2017)은 근래 보기 드문 웰메이드 정통 사극이다. 김훈 작가의 원작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4)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황동혁 감독이 작심하고 만들었다. 150억 원이 투입된 대작에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쟁쟁한 명배우들이 합류했다.


한국 퓨전 사극의 초기작인 <낭만자객>(2003)의 나이트클럽 '주리아나(酒利亞羅)'. 같은 해 TV 드라마 <다모>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청나라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인조(박해일)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한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은 홀로 적장 용골대(허성태)를 찾아 협상의 방도를 찾고,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남한산성에 합류한다.


포위된 성 안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딘다. 우직한 대장장이 날쇠(고수)는 ‘그저 배곯지 않고 살아남기’를 희망한다. 임금은 갈팡질팡하는데 대신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나뉜다. 화친으로 살아남아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과, 죽음을 불사해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 청나라 ‘칸’ 홍타이지(김법래)가 인조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면서 인조와 두 충신의 고뇌는 극에 달한다.


관객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호감형 인물인 대장장이 날쇠(좌). 그의 공간인 대장간만큼은 따스한 노란 빛으로 채워진다.

<남한산성>은 원작의 구성에 따라 11개의 장으로 나뉜다. 황동혁 감독은 원작의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와 결기 어린 분위기를 최대한 스크린에 살리고자 애썼다. 플래시백(회상), 내레이션(해설), 과도한 음악 등의 인위적인 개입을 쓰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리는 시간 위에 이야기를 푸는 정공법을 택했다. 로케이션과 오픈 세트로 현장감을 살렸으며, 컷을 많이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길게 찍기)를 선호했다.


황동혁 감독은 기존 사극의 과잉된 톤을 배제하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처럼 절제된 연출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파괴지왕' 마이클 베이. ’90s 할리우드식 과잉의 대표주자. 멋진 작품들도 많지만 한국영화 촌스러움의 원흉(?)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 대중영화에 보기 드문 ‘절제의 미학’을 구현한 셈이다. 아직도 90년대 할리우드의 과잉된 스타일에 갇혀 있는, 이제 다소 촌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한국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주관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역사적 사건의 현장감과 인물들의 심리를 생생히 재현한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와도 닮았다. 또한 조선 후기 군대의 복식, 병기와 만주어 등의 고증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완벽하다. (사극에서 고증이 가장 중요한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고증조차 엉망인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투 장면에서 <레버넌트> 식 롱테이크를 시도했으나 <레버넌트>처럼 입이 떡 벌어지도록 숏이 길게 지속되지는 못한다. (롱테이크는 원래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주요 캐릭터들은 대중서사에서 흔히 보아 온 전형을 탈피해 세심하게 빚어졌다. 이를테면 인조를 무능한 암군(暗君)이 아니라, 전례 없는 부담과 혼돈 속에 흔들리는 보통의 인간으로 그렸다. 물론 그런 인조 역에 박해일을 캐스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척화파(명과 의리를 지키자)’와 ‘주화파(청과 화친하자)’의 묘사 또한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던졌다. 김윤석은 TV 사극 속의 고지식한 척화파가 아니라 성민들과 교감하며 자신의 길에 대해 번민하는 김상헌을 연기하며, 이병헌은 단지 살아남으려는 현실주의자가 아닌, 김상헌의 고뇌마저 껴안고 이해하는 최명길을 그려냈다.


소설 각색 영화답게 유려한 대사로 빚어진 '말의 전쟁'. 한편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대립을 백색과 청색의 대비로 표현했다.

<남한산성>은 애국주의와 영웅주의, 선악의 이분법 구도에 기대지 않고서 균형 있고 성숙한 주제의식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때문인지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아무리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해도 극장에서 굴욕과 패배의 역사를 보고 싶지는 않은 걸까. 그나마 38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이 모험적인 사극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위안으로 남는다.


황동혁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를 바란다’는 우회적인 말로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 작품을 보고 동아시아 열강의 패권주의를 떠올리며 오싹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남한산성>이 개봉된 2017년은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인한 피해와 불안이 한창이었다.


- <비욘드>지에 실은 글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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