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이 영화들 중 뭐가 젤 맘에 드실까?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인 소위 ‘종군 위안부’ 생존자들은 오랫동안 고통받고 소외되었다. 1980년대 이후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점차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영화에서도 이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는 침묵 속에 지내던 생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이후 13년에 걸쳐 제작된 독립영화 <귀향>(2016)은 할머니들의 뼈아픈 기억과 치유의 과정을 픽션을 통해 충격적으로 재현했다.
앞의 두 시도가 묵직한 정공법이라면, <아이 캔 스피크>(2017)는 휴먼 코미디 장르로 경쾌하게 풀어낸 최초의 성공사례다. 공동제작사인 ‘시선’의 강지연 대표가 기획하고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쎄시봉>(2015)의 김현석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반듯한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명진구청으로 전근 온 날,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적 나옥분(나문희)을 만난다. 한평생 8천 건의 민원을 넣은 ‘도깨비 여사’ 옥분은 민재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자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집요하게 부탁한다. 곡절 끝에 승낙한 개인교습을 통해 민재와 옥분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옥분의 영어 실력도 늘어간다. 하지만 애초에 민원인과 공무원은 친해질 수 없는 법. 상가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둘 사이를 위기에 빠뜨리는 한편, 옥분이 영어를 배우고 싶었던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아이 캔 스피크>는 한국 휴먼 코미디의 익숙한 ‘1+1’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러닝타임의 정확히 절반까지는 옥분이 자신의 사연을 감춘 채 주변 이웃들과 시끌벅적 충돌하는 캐릭터 코미디를 보여준다. 그러나 옥분이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자 결심하는 지점부터 영화는 웃음을 낮추고 진지한 드라마로 전환한다. 옥분의 이웃들과 지역 재개발 문제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봉합하느라 다소 낯설고 작위적인 전개도 없지 않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후반부의 절정을 이루는 미 하원의회 시퀀스는 무척 감동적이다.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은 한편, 영화 못지않게 긴박했던 2007년 ‘HR121’ 청문회의 현장감을 잘 살려낸 연출도 돋보인다. 청문회가 끝나고서 옥분이 줄지어 선 하원의원들과 악수하며 ‘I'm sorry’를 듣고, 일본 로비스트에게 일본말로 준엄하게 꾸짖는 장면은 현실에서 못다 이룬 카타르시스마저 안겨 준다.
옥분 역의 나문희는 대안이 불가능한 최선의 캐스팅이다. 연극, 드라마는 물론 시트콤까지 다양한 장르를 거친 70대의 베테랑 배우는 코미디 연기와 내면 연기를 자유롭게 오간다. 옥분 캐릭터의 실제 모델인 이용수 할머니의 씩씩하고 주도적인 성격을 반영했다고 한다.
<건축학개론>(2012)과 <박열>(2017)에서 여성 상대역과 섬세한 케미를 보여준 이제훈은 이 작품에서도 차분하고 책임감 있는 민재 역으로 옥분과 훈훈한 조화를 이룬다. 옥분의 단짝 정심 역의 손숙을 비롯해, 진주댁 역의 염혜란, 아영 역의 정연주 등 여성 조연들의 활약도 돋보인다. 근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들의 약진이라 더욱 반갑다.
<아이 캔 스피크>는 실화를 바탕으로 장르적 재구성을 가하면서도 진실의 힘으로 감동을 전한다. 그 때문인지 영화는 320만 명이 넘는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비극의 역사를 상기한다’는 명분하에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선정적인 폭력의 재현을 최대한 피한 것은 여타 한국영화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또한 ‘위안부’ 생존자를 우리 주변의 친근한 이웃으로 그려낸 점도 남다른 성취라 하겠다.
이 영화를 관람한 이용수 할머니는 ‘맨날 울고불고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웃음 속에 메시지를 잘 전달했다’며 즐거워하셨다고 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 <비욘드>지에 실은 글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