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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Oct 02. 2024

사랑받지 않을 용기, <조커 : 폴리 아 되> 후기

#영화같은에세이 #조커:폴리아되(2024)

2019년에 개봉했던 <조커>의 후속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 년 만에 개봉일에 맞춰 영화를 보러 갔다. 처음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전작 <조커>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아, 정말이지 굉장한 영화였다.


※ <조커 : 폴리 아 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히스 레저의 잔상

초반부가 지루했던 이유는 아마 내가 다른 시리즈의 조커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다크나이트>,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에서 다뤘던, '악동'과도 같은 다소 유쾌하고 매력적인 조커가 이미 존재했고,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성격은 다르지만 마치 ‘조커 : 에피소드 0’과 같은 조커의 기원을 보여주었었기에, 후속 편에서는 당연히 기존의 조커처럼 냉철하면서도 아주 제대로 미쳐서 날뛰는 조커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거기에 심지어 할리퀸도 등장한다니, 둘이 미치면 도대체 어떤 소동과 난리가 벌어질까 싶었다. 그래서 언제 미치는 거지? 언제 날뛰지?를 기다리며 보자니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감독도 밝혔듯,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기존 DC의 조커와는 별개의 시리즈임을 영화에서 보란 듯이 증명했다.


뮤지컬영화인 이유

토드 필립스는 뮤지컬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노래 신을 많이 넣었다. 진솔한 대화가 나오려 할 때마다 노래로 화답하는 리(레이디 가가)를 보면 답답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리 퀸젤(할리 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라고 아서를 종용하는 대중의 모습을 압축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대중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포함한 극장 안의 관객을 포함한다. 


두려울 것 없는 고담 시의 영웅 조커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고담 시민들과 영화 밖 관객의 마음을, 영화 속의 할리퀸을 통해 종용하는 것이다. 조커가 진심을 털어놓으려 하면 노래를 시작하여 입을 막아버리고, 어느새 함께 따라 부르고 있는 아서는 다시 한번 광기와 망상에 휩싸인다. '틈만 나면' 나오는 할리퀸의 노래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처럼 아서를 흔들어, 아직 조커를 놓지 못한 그가 진짜 자신을 보여줄 타이밍을 놓치게 한다.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의 내면에는 고담 시민과 관객 모두 관심이 없다. 감독은 할리퀸이 대중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비교적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대중’과 흡사한 인물로 설정하는 힌트를 남겼다. 다만 그녀의 행위의 동기는 명확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영화적 장치가 아닌 인물의 서사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지쳐버린 아서는 끝까지 귀를 닫고 노래를 부르는 리에게 애걸하듯 말한다.

"말을 해 줘, 노래는 그만하고."

아서를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광대 조커로 붙들어 놓는 것이 목적인 리 퀸젤의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뮤지컬적 요소가 필수적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뮤지컬 영화로 정해놓고 노래 장면들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 오로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뮤지컬이라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즉, 당신이 영화를 보며 노래 듣는 것이 불편했다면,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다.


폴리 아 되(folie a deux)

감응성 정신병 : 가족 등 밀접한 두 사람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신 장애를 가짐.


다른 시리즈 속 조커의 맥락상, 우리는 리 퀸젤이라는 여성이 조커의 모습에 감화되어 비슷한 수준의 광기를 가진 할리퀸으로 변모하고, 조커와 할리퀸이 서로를 이해하여 함께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네이버 평점에서 낮은 별점을 준 이들이 써놓은 낮은 평의 이유에도 영화가 그들의 그러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음에 있었다.


그러나 <조커 : 폴리 아 되>에서 아서의 정신 장애가 '감응'되는 대상은 할리퀸이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다. 굳이 감응의 대상을 지정하자면, 아서 플렉이라는 한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조커라는 인격을 기대하는 고담 시의 뒤틀린 대중, 그리고 기존 코믹스의 조커를 기대하고 온 관객이 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섹슈얼한 이미지로 주로 묘사되었던 할리퀸은 여기서는 그저 조커라는 특이한 인격에 관심이 있는, 영화적으로는 아서에게서 조커를 불러내기 위한 트리거로 활용될 뿐이다. 토드 필립스는 할리퀸을 통해 '제4의 벽'을 허물고 관객의 선입견을 지적하며 기대와 다르게 흘러갈 것임을 끊임없이 밝힌다(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전작보다는 친절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평점은 앞서 말한 감독의 의도를 눈치채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아서 플렉과 조커 사이

영화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서 플렉은 고담 시민이 열광하는 조커뿐만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로 줄곧 누군가가 원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행복을 주는 해피, 변호사에게는 다중 인격 환자, 하비 덴트에게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리고 리에게는 고담 시의 영웅 조커였다. 그 어디에도 그를 아서 플렉 그 자체로 좋아해 주는 사람은 없다. 단지 사랑받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어머니로부터조차도 충족하지 못한 한 인간은 스스로 인격을 분리했고, 곪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찔리기만 하다 결국 다른 인격을 세상에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나를 제외하면 모두 타인인 이 세상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밝히는 것이 다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어머니부터 자신이 섰던 무대의 관객, 우상이었던 머레이 프랭클린에 이르기까지 일평생 사랑받기를 갈구했지만 사랑받은 적 없는 아서가 진짜 자신을 본인 스스로 밝히기에는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는 것만큼의 노력과 수용, 그리고 용기가 뒤따랐을 것이 분명하다. 사랑받지 않을 용기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다.


수 번의 재판동안 할리퀸과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여 과시적인 조커의 모습으로 분장했던 아서는 마지막 재판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밝히며, 나는 조커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이상 조커를 드러낼 의지도 힘도 없는 그는, 왠지 조커의 의지와 닮아있는, 같은 교도소의 어느 죄수의 칼에 찔리며 최후를 맞는다. 결국 아서 플렉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도 아서 플렉으로서 사랑받지 못했다.


#조커 폴리 아 되 후기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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