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우는 인생철학
앎은 맹목적일 때 무섭다.
내가 뜯고 맛보고 즐긴 경험만이 진짜라고 믿는다.
자신을 무조건 신뢰하겠지만,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자신을 제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꼭 남에게 나의 앎을 강요한다.
상대의 동의가 잠재적으로 불안했던 가벼운 앎을 가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작 세상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게 태어났다.
눈이 뒤통수에 달린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주희진 작가의 <큰 소리 내지 않고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을 보면 페르시아의 흠 Persian flaw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란에서는 최고급 카펫을 짤 때 일부러 아주 작은 섬세한 흠을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라는 장인들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하물며 눈이 먼 앎은 꼼꼼하게 짤 필요도 없다.
누구나 쉽게 뱉을 수 있고 심지어 잘 때조차 잠꼬대로 말할 수 있다.
이케가야 유지의 <착각하는 뇌 상식사전>를 보면 재미있는 사례가 나온다.
‘다들’ 결혼했어, ‘다들’ 좋은 직장 갔어, ‘다들’ 잘 살아 등 우리는 ‘다들’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과연 구체적으로 몇 명을 말하는 걸까?
조사를 해봤더니 고작 세 명 이상이 되면 우리는 각각 한 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들’로 지칭한다는 것이다.
이케가야 유지의 말에 따르면 ‘아무개’라는 개개인의 구체성은 흐릿해지고 ‘다들’이라는 추상적 대상으로 변한다고 한다.
과연 네 번째 사람도 ‘다들’에 속해야 마땅할까?
우리는 그냥 내가 아는 대로 믿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라도 조금 더 고상한 장인이 되어 앎의 섬세한 흠을 만들고 싶다.
앎은 양파와 같아서 모두 까도 알맹이는 없다.
진심으로 알고자 하면 끊임없이 까야 한다.
-깜냥 스승의 제자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