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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Nov 13. 2024

손을 내밀었다

가끔 나는 선을 넘는다. 남편은 그런 나를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는 그래서 다정하다는 말과 부담스럽다는 말을 동시에 듣는다. 타고난 성향이 그런 거라 어쩔 수 없다. 1킬로 빠진 동생의 얼굴을 알아보고, 앞머리를 자른 친구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게 오지랖이라면 나는 기꺼이 오지라퍼가 되겠다. 중요한 건 아무 사심 없이 상대를 대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떳떳하기 때문에 나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그게 싫으면 떠나고, 좋으면 오래 만난다.


오늘은 큰딸의 학교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날이다. 큰딸은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 와서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딸의 절친도 항상 함께 온다. ENFP인 나는 딸의 친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낸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오늘도 딸은 그 친구와 함께 왔다.


갑자기 그 친구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열손가락의 손톱이 뭉툭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얼굴이 하얗고, 똘똘한 그 친구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스타일이라 내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우리 딸이 그 친구만큼 요망 졌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손톱이 왜 그래?


당황한 친구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등 뒤로 숨긴다.

-한 번 보자. 혹시 물어뜯는 거야?

-네.

-어떨 때 그래?

-그냥 불안하거나 속상할 때 그래요.

-네 손톱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안 하고 싶은데 멈출 수가 없어요.

-그러게. 속상하다. 예쁜 손가락이 고생하네.


딸의 친구는 내가 알기로는 모범생이다. 맞벌이엄마와 아빠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다. 4학년인 남동생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에게 힘들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며 쓸쓸하게 웃는 그 친구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넌 뭘 할 때 제일 기분이 좋아? 아니면 속상할 때 뭘 하면 기분이 풀려?

-음. 유튜브를 보거나 좋아하는 아이돌 영상을 봐요.

-그럼 괜찮아?

-처음에는 기분이 좋은데, 다 보고 나면 허무하고 그래요. 막 좋지는 않아요.

-네 나이에는 돌파구가 필요하거든. **이는(큰 딸을 예로 들었다.)는 가끔 피아노를 미친 듯이 쳐. 그걸 보면서 나는 우리 **이가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해. 아니면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그림을 그려. 그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게 좋아. 풀어야 할 게 있구나 생각만 헤.

-혹시 엄마한테 대든 적 있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네? 아니요.

-문을 쾅 닫거나 동생을 두들겨 팬 적은?

-없어요

-답답하겠다.

-네.


뭐라 말하면 좋을까.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는데 대화가 점점 무거워졌다. 꼰대처럼 잔소리하기 싫었다. 내가 아무리 호의를 갖는다고 해도 내 말이 대한민국 중2들의 마음에 제대로 닿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혹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읽었어?

-아니요.

-그럼 한 번 읽어볼래? 내가 정말 힘들 때 읽고 팡팡 울었던 책이거든. 내가 보기에 너는 엄청 슬픈 책을 읽고 감정이 바닥을 쳤으면 좋겠어. 그래야 다시 올라올 힘이 생기지. 네가 자꾸 손톱을 물어뜯는 건 불안하거나 불만이 있다는 표현인데, 불행하게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아무도 몰라. 그럴 때 너보다 더 힘든 사람이 나오는 책을 읽어봐. 그럼 위로가 된다. 나를 한 번 믿어볼래?


딸의 친구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대출하고 갔다. 약장사처럼 아이들에게 책을 추천하지만, 나름대로 법칙이 있다. 아이들에게 이왕이면 딱 맞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방황하던 청소년기에 책은 살아갈 힘을 안겨줬다. 책을 읽는 것에서 더 나가 책 속에 빠져들고 헤엄치며 세상을 휘젓는 동안 나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은 객관화되고, 공유되며, 희미해진다. 책이 가진 강력한 힘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단언컨대 열손가락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유튜브를 보는 것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효과적이다. 부디 예쁘고 사랑스런 그 친구가 책을 통해 마음을 추스르는 행운을 잡길 바란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숨구멍을 찾았으면 좋겠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찾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그 친구에게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타인의 행복은 돌고 돌아 나에게 행운을 선사한다.


오늘 내가 내민 관심과 사랑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당신에게 무한한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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