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통해 삶의 해답을 찾다
작가 고명환은 성공한 개그맨이었다. 순발력 있고, 재치 있는 그의 연기를 기억한다. 개그맨에게 성공이란 쉴 틈이 없다는 말이었다.
왕성한 활동 중 고명환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죽음 앞에서 돌아본 그의 인생은 34년 동안 끌려다닌 삶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깨닫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가 떠올랐다. 고명환은 만일 다시 살아난다면 다시는 끌려다니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는 기적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서 삶의 현장으로 복귀했다.
삶의 변곡점이 있으려면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번개를 맞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가까운 사람의 억울한 죽음등으로 눈빛이 변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가 고명환은 교통사고를 통해 끌려다니는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성공이나 미래를 위한 희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당장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그는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전을 통해 조금씩 삶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작가 고명환은 매일 아침 7만 명이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고, 한 달에 20여 차럐 전국의 강연장을 찾아가 독자를 만나는 이 시대 최고의 강연자이다. 그가 1000일간 외친 '아침 긍정 확언'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가 발견한 해답이었다. '불안감'을 '기대감'의 말로 바꾸면 삶의 방향성이 달라진다는 고전의 답을 따라 매일 10분 긍정의 말을 외쳤고, 삶은 한층 밝고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물음이 생길 때마다 고전을 펼쳐 들었고, 고전 속에 그 모든 답이 있었다.
수백 년의 경험과 지혜가 압축된 고전을 읽다 보면 행복한 삶을 사는 법, 이기는 법까지 독자가 원하는 모든 답을 찾을 수 있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려진 진의를 찾아내서 읽는 건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고전은 그래서 읽기 힘들 때가 있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음미하듯 읽어도 의미를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여러 번 읽어야 될까 말까 하기도 한다.
사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시험지처럼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 매일 채점하며 살 수 있다면 고민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정해진 답을 외워 쓰기만 하고, 그대로 따르면 삶은 간단하고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사람의 마음은 세상 어느 것보다 넓고 깊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정답인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불안하고 걱정되는 오답이 된다.
중학교 도덕 시험이 나왔던 "나는 누구인가?"의 정답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 역시 고전을 읽는다.
고명환의 <고전이 답했다>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개그맨이 이렇게 책을 많이 읽고, 성공했다고 했더니 책에 관심이 없던 남편이 고개를 들어 관심을 표한다.
"오빠, 근데 나 여기 나온 책 거의 읽었다."
"근데, 넌 왜 변한 게 없어?"
"어?" "어......."
말문이 막혔다. <고전이 답했다>를 읽으며, 내가 읽었던 책들이 나오는 걸 좋아만 했는데, 현실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러게. 나는 왜 달라지지 않았을까?"
남편에게 말을 안 했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실천의 문제였다. 나는 책을 읽고, 감동받고, 기억하는 것에서 멈췄다. 고명환처럼 죽음의 문턱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삶의 변곡점을 맞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딱히 뭔가 변하길 원하지 않는다. 지금이 좋기 때문에 지금처럼 쭉 살았으면 좋겠다. 만족하기 때문에 안주한다. 원하는 것이 없어서 꿈이 선명하지 않다. 부러운 사람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좋을 뿐이다.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가 있다. 삶이란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 않나?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나는 과연 후회 없이 기꺼이 죽음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정말 이대로 좋은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정답을 찾기 위해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