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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Mar 13. 2024

전원주택에서 여자 혼자 지낼 수 있을까?

갑자기 생기는 두려움의 마음, 이것의 근원은 무엇일까? 

5월에 이사를 준비하다 보니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이 생긴다.  



이 집에 5월 중순까지는 살아야 해서 그 이후로 날짜를 맞춰보는데, 

마침 짝꿍의 긴 미국 출장과 겹친다. 

잘하면 혼자 이사하고 몇 주 정도 혼자 전원주택에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혼자 이사하는 건 어차피 이삿짐 센터 부르면 할 일이 많지 않으니 별 문제 없는데, 

막상 전원주택에서 혼자 살 생각을 하면 문득 두려움 마음이 생긴다.   



가장 큰 두려움은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는 두려움이다. 

어두워지면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나가야지라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는데, 

학교도 가야하고 외출할 일이 생길테니 사실상 쉽지 않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은 곳은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인데, 

도시의 삶은 워낙 익숙하니 두렵지 않은데, 낯선 전원마을의 삶은 벌써부터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우리의 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이다.  






사실 이 두려움의 끝에는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평소에 아주 익숙하고 안정적이고 편한 환경에서 지낼 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미 극복했나? 싶을 정도로 죽음을 떠올려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데, 

사실 이 두려움은 언제든 알맞은 환경이 갖춰지면 

거대하게 자신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어 보이지 않을 뿐, 

아직 사라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오늘 마침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내가 정말 깨달았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번뇌가 아직 남아있는지 봐야하는데 

남자라면 야동을 보거나 귀신이 나오는 아주 무서운 장소에 가면 된다고. 



깨달았다는 것은 모든 두려움은 물론이고 

존재에 대한 갈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모두 초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신을 봐도, 아무리 무서운 사람을 봐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12연기를 배우면 우리가 어떻게 그 존재를 지속하는 지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연기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무명 때문에 우리는 이 윤회의 삶을 시작한다. 

그로인해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 인해 식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정신-물질(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으로 인해 육처가 생겨난다. 육처가 있기에 접촉이 생기고 접촉이 있기에 느낌이 생긴다. 

느낌이 있기에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가 있기에 움켜 잡으려는 취착이 생긴다. 

취착으로 인해 이번생의 업인 유가 생겨나고, 유로인해 생이 생으로 인해 노사가 생겨난다. 



12연기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에 잘 정리되어 있다. 



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는 느낌(수)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 인해 

그로인한 갈애(애)가 소멸될 수 있도록 돕는 명상이다. 

계속되는 12연기의 끝나지 않는 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느낌과 애착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위빠사나 명상만 한다고 이게 되는 건 아니고,

팔정도를 같이 수행하며 계정혜 삼학을 잘 닦아야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다시 두려움으로 돌아와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때 두려움에 휩싸여서 대비책을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속세적인 해결법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곳은 속세이니 이런 해결법을 생각하고 대비하는 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여기에서 멈춘다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정견과 정사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두려움을 지혜의 눈, 즉 사성제와 팔정도의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나는 왜 두려운가? 아직 집착과 갈애가 남아있어서이다. 

무명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나의 존재에 새겨진 세포 하나하나는 무명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평온을 깰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실질적인 대비를 한다해도, 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변주를 다르게 해서 비슷한 방식의 상황이 펼쳐지면 그 때 또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렇게 정견을 가지고 정사유를 하려 노력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 이것의 허상성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이 온전히 사라졌다고 하긴 어렵지만, 

마음이 훨씬 편해짐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무명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갈애와 취착이 남아있는지 알아차린다. 

하마터면 두려움이 사라진 줄 착각하고 자만할 뻔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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